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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25점과.. 바둑이.. 영이"

Johnangel 2024. 7. 7. 08:14

"영어 25점과.. 바둑이.. 영이"
                                                   
어느 해 늦은 가을, 난 주중엔 대학원 공부로 주말엔 아르바이트로 바쁘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탄 뒤 전철에 올랐을 때였다.
학원이 밀집해 있는 신설동역에서 두 사람이 올라타 내 양옆에 앉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뒤 양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왼쪽에 앉은 여학생을 슬쩍 보니 뭔가를 손에 들고 남이 볼까 조심하여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까 하는 호기심에 잠도 잊고 몸을 뒤로 젖혀 살짝 훔쳐 보니, ‘영어 25점, 수학 20점, 국어 60점, 과학 55점…’, 성적표였다.
점수가 너무 낮아 놀라고 있는데, 그 여학생이 무언가를 또 꺼냈다.
영어 단어장이었다.
여학생은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는 병아리처럼 고개 숙여 단어장 한번 보고, 고개 들어 오물오물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닌가!

한편 오른쪽 사람은 가슴에 ○○기계㈜라는 글자가 새겨진 때묻은 작업복을 입은 30대쯤의 남자였다.

‘저 남자의 손엔 뭐가 있나?’ 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난 깜짝 놀랐다.
그의 손엔 촘촘히 정사각형이 그려진 초등학생용 국어공책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연필로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바둑이, 영이, 철이…’ 입으로 다시 한 번씩 되뇌이면서.

이 무슨 희한한 경험이란 말인가? 너무나 많은 삶의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와 그들의 모습 사이에서 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다.

내릴 때가 되어 다시금 찬찬히 그들을 보았다.
여학생은 여전히 입을 오물오물하고 있었고, 남자는 손과 입을 움직여 가며 열심히 쓰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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