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하나님의 진노(2) (로마서 1:18-25)

Johnangel 2024. 7. 3. 14:29

하나님의 진노(2) (로마서 1:18-25)

                                             

성경은 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단호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진노하십니다.

구약은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시면서 대신 당신의 아들을 진노의 대상으로 삼아 제물로 죽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감격적인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보배로운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깨달을 때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그분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가 퇴색되고 무의미해질 뿐입니다.

한번 가정해 봅시다.

지금 내 자식이 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방탕하고 패역한 삶을 살아가는 자식을 보고,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입니다.

사랑하는데 정당하고 정직한 진노가 없다는 것은 그 아이를 타락시키는 지름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 있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종파, 어떤 교파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말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나타납니까?

 

세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첫째는, 경건하지 않고 불의할 때입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에서 쓰인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경건하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롭지 않은 것이 본능적 인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의로움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한 사람이 사람 앞에서 절대 의로울 수가 없고, 사람 앞에서 불의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가정에 불충실한 사람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고,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가정에 충실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우리의 의로움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로움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아직도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거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단체들이 내부적으로 잘못 운영되면 기독교의 본질을 퇴색시키는 단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집행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랫사람들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아랫사람들이 보기에, 윗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보여주는 행태는 하나도 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19-20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이 피조세계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나뭇잎은 떨어집니다.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일깨워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의 법칙 속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서로 이타적으로 살아갑니다.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주고, 공기는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나뭇잎은 공기를 정화시켜 줍니다.

이런 법칙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능적으로 욕심만 챙겨야 합니까? 아니면 남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까?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아무리 큰 권력, 힘, 군대를 가지고 있어도 끝내는 정의가 이깁니다.

이런 역사 속에 살면서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탐합니다.

한번 잡으면 놓지 않고 권력의 노예가 됩니다.

그 끝이 참혹함을 분명히 아는데도, 본능 앞에서진실의 눈을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도, 왜 그것을 보려 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안의 본능과 욕망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밖의 것을 보려 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내리실 것은 진노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때입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자기 욕망, 자기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부류와 달리, 자연현상이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은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믿으라.”는 말에 “나는 지은 죄가 많아서...”대답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절대자를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화를 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방탕하고 타락한 삶을 살면서도 멋지다고 여길지언정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은 마약중독자와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 바로 마약 중독자입니다.

마약을 하면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된다는 알면서도 자기 몸에 투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찰나적인 쾌락을 못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몸에 마약을 주사합니다.

본문에 “허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마약중독자가 자기 몸에 마약을 투여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입니까?

이런 사람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상을 섬길 때입니다.

22-23절을 읽겠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예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국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돌로 멋진 상을 만들어 그 상에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면서 “이 상이 나에게 복을 주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돌을 조각한 자신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장승을 없애고 눈에 보이는 특정한 물건을 없애라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믿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본문에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동물들 모양의 우상을 섬기지는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띠”라는 것을 따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ㅡ 자신이 태어난 해를 열두 동물에 맞추고는 무슨 띠, 무슨 띠 하면서 동물과 동일시 합니다.

이를 테면 “봄에 태어난 소띠는 일이 많다.”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우선,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임했습니까?

소돔 성을 보면 하늘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습니다.

소돔에 불이 쏟아져 내리기 전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심판을 재고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소돔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불이 쏟아져 내린 후 아브라함이 멀리서 연기가 치솟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인간이 힘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람, 즉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노의 대용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멸절입니다.

 

노아의 홍수, 소돔 고모라의 유황불에서 보듯 전부 쓸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지어 놓고 그 성전을 우상으로 섬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도 쓸어버리셨습니다.

 

둘째는, 전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것처럼 임하는 경우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더욱 두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착각할 뿐이지, 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철저하게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냥 방치해 두신다는 말입니다.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했고, 26절을 보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했고, 28절을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중에서 가장 무서운 진노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욕에 버려두고, 욕심에 내버려두고, 상실한 마음 곧 비인격적인 상태에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정욕대로 살면 멋지게 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러지 같은 삶 속에 내버려 두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 어떤 방식으로 진노하시는지 살펴보았습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지금까지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끝을 맺고 있는데, 그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비로소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짐승 같고 버러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여 양털같이 희게 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잘못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징계해 주심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짐승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히12:8절을 보면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데도 주님께서 나를 징계하시지 않으면 나는 주님의 자녀가 아니라 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셨습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회초리를 들고 매를 치시면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늘 깨어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하나님께서 더욱 복된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