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내가 빚진 자라(2) (로마서 1:8-15)

Johnangel 2024. 6. 22. 23:49

내가 빚진 자라(2) (로마서 1:8-15)

                                            

바울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각 정행” 즉 바르게 깨닫고 깨달은 것을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고 해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다 해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독교인이 25%를 차지하는데도 이 땅의 화평과 사랑의 열매는 그만큼의 정도로 맺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무척이나 익숙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에게 진 빚을 갚는 데는 인색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의 75%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말하는 “은사”란 선물을 뜻합니다.

바울이 만 가지 고난을 무릅쓰고 성도들을 찾아가 만나려 하는 것은 은사를 나누어 갖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나눔입니다.

구체적인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 법대 교수인 모 집사님이 법대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아는가? 우리 동네, 우리 교회, 우리 친척 중에 똑똑한 사람이 있으면 왜 그를 자랑하고 높여 주는 줄 아는가? 그 사람 덕에 득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때문에 득을 보기 보다는 사회 전체가 해를 입는다. 너희가 아무리 법대를 나와 고시를 패스해도 너희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나아지는 일이 없다면 권력이나 휘두르며 너희끼리만 잘되면 너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초대교회를 존경하는 눈으로 쳐다보았습니까?

구체적인 나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왜 교회가 욕을 먹습니까?

나눔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나누어야 합니까?

시간입니다.

시간을 나누지 않고 돈만 나누는 것은 적선일 뿐입니다.

동냥하는 거지에게 돈 몇 푼만 쥐어준다면 그것은 적선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님께도, 부부간에도, 친구사이에도, 누구에게든지 시간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부터 사랑은 시작됩니다.

시간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의 눈 속에서 근심의 빛을 읽을 수 있고, 시간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의 말 속에서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시간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나의 물질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는 이유를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위로 받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가 위로받기 위해서는 서로 상대방을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은 내가 상대방의 처지까지 낮아지고, 그다음에는 상대방을 나의 수준까지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그 사람이 일평생 자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도움을 받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대등한 위치가 되어 나타나r나 전세가 역전되면,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끌어내리려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를 최소한 나의 수준까지, 그다음에는 오히려 나보다 더 높여 주는데 있습니다.

내가 남을 높여주면 그만큼 나 자신이 깎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상대방을 깎아내립니까?

상대방을 깎아내리면 상대적으로 자기가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사람은 절대로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상대방을 자꾸 높여주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나를 따르게 됩니다.

상대방을 높여주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그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는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는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로마 성도들 가운데서도 열매가 맺어지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독립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더 이상 바울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고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바울이 추구하는 사랑의 최후 목표였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내가 도와주는 사람을 나에게 묶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일들을 부어 주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독립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일평생 묶게 됩니다.

창2:24절을 읽겠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결혼시킨 뒤에도 독립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세우셨던 것처럼 자녀와도 함께 하시고 세워주신다는 것이 부모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게 하는 것, 이것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자녀에게 사랑을 주어 봐야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나의 사랑이라는 것은 미약할 따름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가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넷째, 나누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를 나의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여섯째, 그를 하나님 앞에서 독립된 인격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복음의 빚진 자다.”라고 말한 수준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의 빚을 누구에게나 갚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위에 포진되어 있는 그들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그 마음을 통로로 삼아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제 주위의 많은 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빚을 저를 사랑하는 것으로, 타락의 어둠 속에 있던 저를 사랑하는 것으로 갚고자 했을 때 하나님게서는 그들의 심령을 통해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사랑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는다면 하나님께서 바울 한 사람을 통해 로마를 바꾸셨듯이 여러분의 심령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기필코 변화시켜 주실 것임을 믿고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