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각인된 사람들 (로마서 16:6-16)
여러분은 인생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인생은 관계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관계에는 아픈 관계와 좋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생애 가운데서도 그의 삶에 아픔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를 향한 사랑담긴 편지지만 또 유언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딤후4:14-15절에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복음을 대적한 것입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바울의 마음에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딤후4: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 교회를 버리고 사도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사도바울의 마음에 잊혀 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로마서 16장에 약 서른일곱 명의 개인의 이름이 거론이 됩니다.
이들은 모두 평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사도바울과 동역했고, 바울에게 기쁨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가 익산시에서 대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사와 장로님 몇 명만 잘해서 안 됩니다.
교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분, 즉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평신도 여러분들이 로마서 16장에 소개된 사람들처럼 올바로 소명을 발견하고 깨어나게 될 때 우리교회에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들에 대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그 사람이 주신 모든 것이 동결됩니다.
그에게 주신 지혜, 은사, 재능, 탤런트들이 묶여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만, 부모 때문에 자녀가 늘 두려움에 눌려 있게 되면 나중에 사회에 부적응자가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그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를 묶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참 자유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분노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분노가 사랑을 지배하면, 나타나는 것은 파괴적인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분노는 나도 죽이고, 상대방도 죽이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원래 성격이 그래”라고 하는 사람은, 성격까지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면, 성격적인 면도 주님이 씻으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열정과 통합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이 변화 받으면, 열정 있는 주의 사람으로 변화 받습니다.
분노와 열정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다릅니다.
열정은 생산적이지만 분노는 서로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속에 혹시 분노가 자리 잡은 것이 있으면, 주의 보혈의 은혜로 분노가 변하여 사랑으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유혹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유혹과 항상 같이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대적인 사탄 마귀가 지금도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유혹을 뛰어 넘어야 됩니다.
치우치는 것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 힘써야 되는 것이지, 우연히 잘되는 교회와 부흥하는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유혹들을 분별해내는 안목을 주시고, 그 악한 영을 떨쳐 버리는 영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력이 있어야 우리에게 오는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에 굴복하면서 살면, 사람은 자존감을 상실해서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 보다”라고 자포자기합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발도 듣지 않습니다.
희망의 불이 꺼진 다음에 무엇을 가지고, 마음속에 희망의 불을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얼마든지 마음의 분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눌리지 않았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야 되는 것인가?”를 늘 마음에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6장에 이런 사람들, 즉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의 명단을 열거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1.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고전13:13절에 보면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다른 것이 빛이 납니다.
다른 것을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사랑이 빠져버리면, 불완전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모든 것은 완성됩니다.
우리의 결혼생활,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8-9절에 보면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영혼이 미소 짓고, 영혼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 죄인인 영혼이 찌들어 있거나 눌려 있을 때, 어떻게 다시 생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빛을 쬐는 만큼, 그 영혼이 주님 앞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이 사랑을 유통하는 교회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현교회하면 사랑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교회라고 이웃에 소문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2.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6절에 보면 “너희를 위해서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성은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교회에서 인격이 검증되었고, 사명을 수행할 때 인정받았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마리아처럼 인격적인 면에서, 사명을 탁월하게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인정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3.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입니다.
7절에 보면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와 함께 갇혔다”는 말은 “바울과 함께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드로니고가 무엇 때문에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까?
그것은 안드로니고가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하여, 온 몸을 던져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인정함을 받았다”는 것은 “수고를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험을 받고 검증되고 그 인격이 아름답게 세워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들은 모두가 다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다 적당한 선에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 부흥을 위해 바울과 손에 손을 잡고 함께 동역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과 직분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헌신한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 그것을 가리켜 “영생의 관계”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0-12절에도 계속해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동일한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가슴에 영원히 남는 사람입니까?
주안에서 생명을 공유한 사람,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영원히 남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기억에 남아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이천년 동안 계속해서 지금도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무명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주님의 마음속에는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각하면서 “혹시 사람들은 나를 못 알아주고, 혹시 나를 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가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로 든든히 서가기를 소원합시다.
나 자신과 우리 가정을 통하여 공동체의 건강성에 힘 있게 기여합시다.
대 사회적인 신뢰와 아름다운 평판을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확산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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