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생명축제

새생명축제(귀빈축제,행복축제) 설교 원고 (누가복음 15:11-24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Johnangel 2015. 11. 23. 00:57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누가복음 15:11-24)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얻지 못하고, 가정문제, 건강문제, 경제문제, 장래문제, 정신문제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쾌락은 있어도 참된 행복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떤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와 담판을 하고, 떼를 써서 그 재산을 받아 먼 나라로 가출해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둘째 아들의 가출심리를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자유를 찾아 먼 나라를 향해서 떠나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쩌면 탕자의 화려한 외출이였고, 당당한 독립선언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내용의 초점은 둘째 아들이 떠나간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 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이상하게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내용은 탕자의 가출의 드라마가 아니라 귀향의 드라마 그리고 회심의 드라마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일생과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세 가지 물음을 여러분에게 던지고자 합니다.

1. 무엇이 그를 돌아오게 했을까요?

14절을 읽겠습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렇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풍요함이 아니라 흉년이었습니다.

그것도 적당한 흉년이 아니라 큰 흉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증권에 투자하여 풍요를 꿈꾸었을이지 모르지만 그는 지금 가난한 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간섭도 없는 자유를 꿈꾸며 떠나갔을지 모르지만 그는 지금 돼지 쥐엄요리를 먹고, 돼지를 치고 있는 노예의 자리로 전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펼쳐지는 사랑, 그런 사랑을 꿈꾸며 떠나갔을지 모르지만 그는 지금 뼈가 저리는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스도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때 하나님만 떠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는 자유를 떠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도 떠난 것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가치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먼 나라에서 인생의 큰 흉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흉년을 경험하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흉년이 그에게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에 보면, 이 둘째 아들은 이 인생의 흉년 속에서 자기의 처지,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일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독백입니다.

아마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를 회고하며, 아버지와 함께 있으므로 누릴 수 있었던 그 풍요함이 생각났고, 또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누릴 수 있었던 그 마음 따뜻한 안식을 생각해 냈을 것이고, 또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누렸던 그 조용하지만 자기의 마음을 감싸고 있었던 평화를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영어성경을 읽어보면 그 표현이 더 재미있습니다.

“He came to himself” 즉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살았을 때, 그는 마음대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래간만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틀림없이 이런 결론 앞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나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야”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 생각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둘째 아들에게 찾아왔던 인생의 흉년은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의 장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어떤 고통과 고난들은 변장된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궁핍도 때로는 인생의 장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장에 흉년이 왔다고 생각되면 내가 내려야할 결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는 사람은 더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좀 쉽게 말씀드리면, 흉년 속에서 주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또 흉년이 오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둘째 아들을 돌아오게 했습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경험하는 어떤 흉년, 그리고 진지한 생각, 이 두 가지가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2. 그는 어떻게 돌아왔습니까?

2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가 왜 일어났습니까?

그는 그 먼 나라를 떠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떠남의 출발이었고, 일어났다는 것은 떠나기 위한 행동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일어나 지금의 자리를 떠나서 아버지에게 돌아오려면 행동을 해야합니다.

18-1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다시 말해서 그는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생각만 하시겠습니까?

물론 생각은 전환점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생각만 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이제는 행동을 하셔야 합니다.

불신앙의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내가 의도적이든 의도하지 않았든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그 자리를 박차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은 결단이요, 행동입니다.

내 삶의 뿌리, 나의 창조자, 나의 심판자, 그리고 나의 구원자, 그 분에게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돌아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아오면 나를 받아주시고 상주실 아버지, 그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하신 그의 품성을 믿고, 안심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십시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3. 그는 어떻게 영접되었을까요?

20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이 둘째 아들이 지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아버지와의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여기 “거리가 먼데”라는 이 말씀을, 단순히 문자적인 거리일뿐만 아니라 아마도 이 둘째 아들이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을 심리적인 거리였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얼마나 개판치고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비웃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 주실까? 하는 자신의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던 그 어떤 무거움, 스스로 만든 자격지심, 심리적인 그 공간의 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누구를 먼저 보았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성경학자는 “아들이 간신히 아버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을 무겁게 내딛는 순간 아버지는 열 걸음으로 달려왔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아들이 돌아오는 스토리 일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스토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그렇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다리심으로 맞아주시던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에게 완벽한 회복을 주셨습니다.

22-24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은 우리의 죄만 용서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의에 새 옷을 입혀주시고, 새로운 언약의 반지를 끼워주시고, 새 출발을 축하하며, 송아지를 잡아 천국잔치를 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은 이렇게 잔치를 배설하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당신의 불행은 죄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이 잃어버린 그 인생의 참된 행복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소원하시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이 시간 당신의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구원자 예수님이 당신에게 반드시 참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 행동으로 옮겨 저와 함께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 예수님에게 나아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접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또 주님으로 내 마음에 모십니다.

주 예수님. 지금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해 주신 예수님.

나를 용서하시고 내게도 영생을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또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