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절 설교원고 - 누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2:1-14)

Johnangel 2015. 12. 3. 23:10

누가 성탄을 기뻐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 2:1-14)        

                                                          

우리 교회공동체 가족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서로 기뻐하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렇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아구스도의 명령대로 호적을 하기 위해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온 요셉과 마리아는 “빈방 있습니까? 빈방 있습니까?” 하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빈방을 애타게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아내 마리아가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은 얼마나 빈방을 구하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빈방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찬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 가지고 적당히 깨끗하게 한 다음, 거기에다가 몸에 걸치고 온 헤어진 천을 깔고 그 다음에 그 구유에다가 아기를 낳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물을 끓여 양동이에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자,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가 소를 키우셨기 때문에 마구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한국의 소를 키우는 마구간과, 유대 나라의 양들을 키우는 마구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정말 냄새는 고약합니다.

그만큼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 자신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주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가 전한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시 말해서 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사랑스런 인간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트너, 항상 보아도 사랑스럽고 기쁜 파트너, 하나님께서는 이 파트너를 갖고 싶어서 우리 사람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의도를 차 버리고 사탄에게 유혹에 넘어가 모두가 제 마음대로 가 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버린 죄로 인하여 인간은 일평생 저주를 받아 근심하며 수고하면서 살아도 나중에는 슬픔 밖에 남지 아니하는 허무한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서 제 마음대로 산 죄 값을 짊어지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날마다 문 밖에 나와 기다리며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것들이 나를 섬기는 것을 가장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는 인생으로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 인간들이 나하고 교제를 나누는 것을 가장 행복으로 생각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까?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 원래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바꾸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저 높은 곳에 앉아 가지고는 되지 않고, 자신이 세상으로 가야 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결단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야지” 결단하시고 하나님은 그 거룩한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그 권세와 능력과 아름다운 옷을 벗어 던지고 친히 베들레헴 말구유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려 오셔도 누구나 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오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그도 흘려 보기를 원했고, 우리가 고통하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했고,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우리의 죄 값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었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고, 낙심이 아니라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되어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는 거룩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와 같은 구원을 주시는 이가 오셨으니 어찌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우리가 기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 사람들이 기뻐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고 영접한 사람은 도대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너무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구주로 오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를 영접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아마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과,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목자들처럼, 마리아처럼,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쁨으로 맞이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