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나이다 (마가복음 9:14-24)
공자는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신(信)”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족식(足食)은 생활의 안정이고, 족병(足兵)은 자주국방이며, 신(信)은 국가의 공신력을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공자는 “신(信)”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이유는, 나라의 경제력이 없어도 살고, 군대가 없어도 살 수 있으나, 신(信) 즉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대답한 것처럼, 삶에서 믿음은, 중요한 정신이고, 질서이고, 철학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오늘날은 무신론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황금만능주의로 인해 물질적 부요와 풍요로움을 누리는지는 몰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라진 믿음,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상실로 인해 정신과 영혼은 더욱 피폐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눅18:8절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고, 마17:17절에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했고, 또 오늘 본문 19절에서도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며, 주님께서는 반복하여 불신의 이 세상을 향하여 책망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롬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세상의 썩어질 물질이나, 사라질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은 어떤 아버지의 귀한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사건은, 그의 믿음이 연약한 믿음에서, 확고한 믿음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믿음의 세 단계를 살펴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 보고자 합니다.
1. 변론하는 믿음입니다.
마가복음 9장 1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상에 오르셨습니다.
이때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변형되어 그 옷이 광채가 나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으며, 엘리야와 모세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말씀하시는 광경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 놀라운 변화산상의 광경을 보고, 황홀에 젖어 있는 것도 잠시일 뿐, 그들이 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너무도 인간적인 답답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치료해 달라.”고, 찾아온 아버지와 그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기관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께서 19절에 보면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 세대는 참으로 믿음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의 믿음 없음보다도, 예수님을 더욱 슬퍼하게 만들고, 탄식하게 한 것은, 아홉 명의 제자들의 믿음 없음이었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과 아이 아버지가 지녔던 믿음은, 변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십니다.
권능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능치 못할 것이 없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막9:1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분의 능력을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이러한 능력을 행하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변론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으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막9: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5:15-16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기도 없이는, 능력도 없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능력이 없는 대신에, 변론만 생겨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론하는 믿음에서 떠나, 기도하는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의심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 가운데 가장 절망적인 것은, 아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믿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이며,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벙어리 귀신들린 아버지가 예수님께“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바로 의심하는 믿음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믿음이지만, 소극적 태도입니다.
절반은 믿음, 절반은 반신반의하는 의심에 둔 믿음입니다.
그래서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이 아버지의 이런 믿음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실 수 있거든”의 믿음이 많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는 오지만 달라진 것도 없고, 변화된 것도 없으며, 늘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환난을 이길 수 없고 핍박을 이길 수 없으며, 시련과 고난과 재앙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날 때,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생동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능력과 기사가 일어나고, 이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못하실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신앙을 버리고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24절에서, 아이 아버지는, 비소로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곧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그는 변론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주님에게 “하실 수 있거든”하는, 의심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믿나이다.”의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King James(킹 제임스) 성경에는 본문을 “그 아비는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불신을 회개하고, 자기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간구했다.”고 했으며, NIV(엔 아이 브이) 성경에 보면 “믿습니다. 저의 불신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의 변론하는 믿음 “하실 수 있거든”의 믿음을 “어찌하여 너희가 변론했느냐?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을 통해서, 그의 믿음은 한층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고백은, 바로 그 아버지의 신앙이 성장하고, 그가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책망을 달게 받을 때, 주님의 책망을 기쁘게 받을 때,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슬픔을 당해도, 시종일관 “내가 주를 믿나이다,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하는 성장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이의 아버지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치며,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이 생명 있는 믿음으로, 그의 언어가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우리도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성도, 확신 있는 믿음에 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17:20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구하고 얻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작은 연고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는, 문제의 홍해 바다, 문제의 요단강, 문제의 여리고 성이 갈라질 수도, 무너질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가슴을 치며 통회자복하는, 기도의 눈물을 쏟아야 합니다.
변론하는 믿음, 의심하는 믿음에서, 확신하는 믿음으로의, 성장을 이뤄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으로 믿음의 기적을 산출시켜 나아가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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