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를 잊지 않은 사람 (누가복음 17:11-19)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기억한다.”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은 “반드시 기억해야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어떤 것은 “기억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만나 나병을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고침받기를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함께 나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한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과거의 모습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왜 사람들은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잊는 것일까요?
과거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병환자들도, 지난날 자신들이 체험했던 과거를 기억했다면, 그들은 결코 감사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했던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아홉 명과 달리 주님께 돌아와 감사했던 이 사람은, 어쩌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개 취급을 받았던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그에게 열등의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그것이 이 사람이 문둥병치유를 체험했을 때 “아!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구나!”하는, 더 큰 감사와 감동을 느끼고, 즉시 주님께 돌아와 감사하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 왕을 잘 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윗 왕은, 한평생을 감사함으로 살아간 좋은 본을 보인 인생이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다윗은 자기 과거의 모습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하7:18절을 보면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다윗이 왕위에 앉아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가난한 목동으로 고생하던 그 과거와, 그의 장인이었던 사울 왕으로부터 쫓겨나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그때, 주님이 도우셨던 그날들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 역시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이고, 영적인 “과거를 잊지 말고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엡2:11-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거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오늘 이 자리에서 “하늘나라의 기업과 영생의 소망을 갖고 주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2. 현재의 감동을 붙잡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영성으로, 한평생을 이 땅에서 살고자 한다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 못지않게, 현재의 성령감동을 붙잡고 살아갈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행복감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의 성령감동을 붙잡고 사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들은 믿음과 순종의 도상에서, 나병을 고침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 “그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을 만나러 가는 도상에서 깨끗함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나병의 치유를 체험했던 “아홉 명의 사람들도 언제 한번 예수님을 찾아가서 감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은 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이던 이 사람만은, 그 감동과 감사를 내일까지, 아니 그 언젠가의 미래로 미루어 둘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성령감동을, 현재의 감사로 드리기 위해, 곧장 예수님께 달려 온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런 경험을 가르쳐 “성령에 민감해야 한다.”는 표현과 함께 사용해왔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도바울이 살전5:19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한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 즉시 행동하는 것이 바로 현재의 행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저도 얼마 안 되는 내 삶의 믿음의 여정이었지만, 기도하다가 누구에게 연락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기쁨이었고, 언제나 행복이었고, 언제나 경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두었던 것은, 언제나 후회였고, 언제나 아픔이었습니다.
여러분, 감사의 영성으로 한 평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현재의 성령 감동에 민감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을 소멸하지 마시고, 즉시 순종하십시오.
지금 찬양하십시오.
지금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감동일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중세기의 수도사들은 “현존의 행복”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중세기의 수도사들이 세상과 단절하고, 삭막한 사막에 격리된 삶을 살면서도, 그들이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행복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존의 행복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3. 선하신 주님께서 계획하신 미래의 삶의 여정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남은 인생길을 행복하게 갈 수 있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인해 감사하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는 내일이 준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스펄존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이 주어지고, 달빛을 인해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이 주어지고, 햇빛을 인해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마리아 사람이 경험한 행복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이 나병치유를 체험하고 “즉시 돌아와 주님 앞에 엎디어 감사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9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다시 말해서 “그가 육체의 나병치유를 인하여 감사했더니,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축복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답답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멋진 감사의 제단을 쌓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존 데이비슨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를 아십니까?
그는 세계적인 거부였지만 사실은, 빛과 그림자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한때는 대중들에게 “더러운 자본가”라는 평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는 43세에 미국에서 가장 큰 회사를 소유하게 되었고, 53세에 억만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자가 됩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그의 재산은 오늘날 세계적인 부자 빌게이츠의 3배를 소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나이 55세 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는 기관지, 탈모증, 신경병, 위궤양, 탈진, 등으로 쓰러집니다.
정밀종합 진단결과 그는 “이런 몸과 마음의 상태로 1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의사의 결정적인 경고를 받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당시 하루에 100만 불을 벌고 있었지만, 그 모든 돈이 이제는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그는 잠도 못자고 먹지도 못한 채, 몇 날을 보내다가 한 밤중 침대 옆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본래 부모님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자라난 믿음의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드리는 성실한 삶을 살아왔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사실상 십일조도 어려워졌고, 믿음생활은 형식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어렸을 때,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다가 갑자기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이 되신다.”고 소리치며 일어납니다.
그는 즉시 자기가 영적지도자로 신뢰하던, 담임목사인 프레드릭 게이츠(Frederik T. Gates)목사님을 초청하여 의논하고,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인 자선사업과 선교사업을 시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재단에 자기 수입의 절반 이상을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는 십일조를 의무로 드렸지만, 이제는 십일조를 감사로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유명한 시카고대학을 비롯하여 12개의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을 세우고, 자기의 남은 생애 동안 5,000개의 교회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어머니를 기념하여 세운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를 시작으로 4,928개의 예배당을 지어 헌납하게 됩니다.
그 후 55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던, 그는 98세까지 살며 “더러운 자본가”에서 “위대한 자선가”로서의 간증을 남기게 됩니다.
록펠러는 그의 나이 98세에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느끼는 순간, 55세 때 침대 곁에 무릎을 꿇던 모습으로 엎드려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제 인생의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불행하게 살았지만, 지난 43년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동안 저를 지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제가 그토록 보고 싶던 주님과 천국에 먼저 간 사랑하는 제 아내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이 지난 새벽에,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코로나19사태 속에 맞이한 추수감사절을 여러분은 어떤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겠습니까?
최고 최선을 다한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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