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존중히 여기시는 주님 (요한복음 10:1-6)
가정문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역기능 가정, 혹은 순기능 가정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오해하는 대로 자녀들의 수나, 경제적 수준에 따라, 역기능 가정과 순기능 가정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기능 가정과 순기능 가정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관계입니다.
따라서 부부관계, 부자관계, 형제자매관계가 깨어져 있는 가정이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그 가정은 역기능 가정입니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온 가족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정은, 순기능 가정입니다.
그런데 확대 된 가정으로 불리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기능 교회와 역기능 교회로 나누어집니다.
순기능의 역동적이고 성장하는 교회는, 성도의 수나, 경제력이나, 건물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 교역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역동적이고 아름다우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역기능 교회가 있고, 역기능 가정이 있고, 역기능 직장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의 상처가 재생산됩니다.
오늘은 주님께서는 “그 분의 양떼 된 우리들을 어떻게 존중하시는가?” 그 원리를 살피고자 합니다.
1. 주님은 개인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렇습니다.
목자가 양을 알듯이, 주님은 우리가 어떤 부분이 연약한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모두 다 아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다.”는 말씀은 “사랑한다, 용납한다, 또는 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기분이 상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상대방을 존중할 줄 모르고, 무시하는 것 때문입니다.
반면 상대방이 자기를 정말 존중해 준다는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든, 만남을 통해서든,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함부로 대하시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을 모두 다 아시고, 존중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쁨과 과거의 실패 등,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포용하십니다.
거기에다가 개인적인 친밀감을 더하셔서,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께 사랑 받기를 사모하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면, 주님께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개인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사람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크거나, 작은 것의 문제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시간 중요한 것은 “개인적 친밀감을 누릴 수 있는 구조인가?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두가 함께 축제하기에, 충분하게 큰 교회이면서도, 또한 한사람도 예외 없이 돌봄을 받기에, 적절한 작은 교회를 소망합니다.
2. 주님은 앞서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자녀들을 낳은 후, 방치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상처를 입고, 사회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결코 그냥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만 하시고, 돌보시지 않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 생명으로 덧입히시고, 계속해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보전하십니다.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친히 인도하시는, 주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의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출애굽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광야생활 중에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40년 동안이나,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친히 인도해주셨습니다.
시시때때로 모세, 여호수아, 다윗을, 비롯한 여러 하나님의 일꾼들을 택하여, 백성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탄생부터 오늘까지,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까지 은혜의 손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잊으신 적도 없고, 방치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한 목소리로, 이렇게 고백하기를 소원합니다.
“내 가정과 우리 교회를 앞서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주님을 신뢰합니다.”
3. 주님은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심으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 “얻는다.”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잘 이해하시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종종 교회에 가면, 시간, 돈, 에너지, 명성, 등. 뭔가를 다 빼앗긴다고, 오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 믿은 후에는 “내가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놀라운 것을 얻게 되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욱 만족한 삶을 이루도록,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이 지역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 지역사회의 모든 이웃들의 영혼과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주님은 가장 소중한 것을 주셔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11절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자신의 것을 다 주시기 때문에, 사랑과 희생의 대명사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나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입은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주셔서, 우리를 존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인들 두 목숨이겠습니까?
롬5: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존중해주신 주님께 우리도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 주님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강요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존중 받는 만큼, 자존감을 가집니다.
또한 자신이 대우를 받는 만큼, 건강한 자아상을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 됨과, 천국을 상속받음과,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고현교회의 가장 소중한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보배이신 그 주님을, 이웃들에게 소개해드리고, 선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가 이웃에게 복음을 주지 않고, 어떤 다른 좋은 것을 준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좋은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이 부족해도,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을 줄 수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한 교회로 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가장 소중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쓰다가 남은 잉여물을 던지듯 주는 것은, 이웃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비타민 C가 우리 몸의 건강에 도움을 주고 필요하듯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타민 L 곧 Vitamin Love입니다.
사람은 사랑이 공급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면, 인생이 황폐해집니다.
오늘 본문은 목자와 양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목자가 양을 대할 때, 양이 많다고 해서, 한 마리쯤은 하고 소홀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요10:15-16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의 목자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우리를 존중해주시는 주님. 앞서서 우리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주님.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시는 주님을 닮아 2022년에도 우리 교회 문턱을 넘는,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복된 교회를 이루어 나갑시다.
예수님의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외관이 화려하고, 아름다워도, 그 교회는 이미 심장이 멈춘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자존감의 최후의 보루가 되게 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존중해 주심이, 세상에서 지친 영혼의 새 희망이 되게 합시다.
이 일을 위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이 기대하시는 일에 쓰임받기를 갈망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송구영신예배에서, 소원했던 기도응답을 받고,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2022년 한 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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