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마가복음 9:14-29)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산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동안, 산 밑에 있던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침 한 아버지가 예수님을 만나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기를 바라는 기대 속에,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찾아 왔으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자 산 밑에 남은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치지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을 때 마침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고쳐주는 장면입니다.
우리 성도와 교회도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곧장 능력을 보였지만, 이와 같이 지금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지속 반복하여 기도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 땅의 불확실한 삶을 살면서, 기도의 필요성은 잘 알지만, 막상 지속 반복하여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권세를 가진 자들로써, 자기에게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그 잠재력과 능력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열등감 때문입니다.
여기 산 밑의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도, 아마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간 세 명의 제자들에게 대한, 열등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평등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산 밑의 남아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이 잘못된 열등감 갖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마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들을 제외시킨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과 의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의는 신뢰관계입니다.
따라서 의는 올바른 행동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인 것입니다.
창15: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에 최초로 “의”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의 유일한 방법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의는, 행위가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5:20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열심입니다.
그러나 참된 의는 “예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관계회복 후에, 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열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1장에서 부터 8장까지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의 관계회복”이라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그리고 롬12장이후부터, 십자가와 관계회복이 이루어진 뒤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행위에 대한 명령이 나옵니다.
교회사를 보면, 성경의 “의”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어거스틴과 칼빈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마틴 로이드 존슨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항해술이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이 지속 반복하여 기도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그들의 잘못된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다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분적으로 열등한 것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문제를 해결받은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잠재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돌아본다면 그 열등감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막9:23절을 읽겠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성경에서 열등감을 크게 느낀 인물을 들자면,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두 아내 중 “레아”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동생 “라헬” 대신에, 야곱의 첫 번 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정말 자존심 상하고,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기도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야곱을 통해 8명의 아들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두 성경적으로 지었습니다.
둘째 아들 시므온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이고, 유다는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예쁘고 아름다웠지만, 창30:1절에 보면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기와 질투로 펄펄 뛰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은 자기의 여종 빌하를 남편인 야곱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함으로써,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난 아들의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단이란 “나의 한을 풀었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그런 라헬로부터 참된 위로를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죽고 난 후에, 레아는 그와 합장되었습니다.
우리도 누구나 레아와 같은 열등감이 있고, 연약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여기 산 밑에 남아있던 9명의 제자들도 “내가 준비되지 못해 쓰임 받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고 기도했더라면, 아마 그들은 더 크고 존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는 이 시간 기도로 열등감을 이기고, 크게 쓰임 받은 자가, 바로 레아의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자신의 열등감 때문에, 분노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열등감은, 예수님과 관계회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도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속 반복하여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망하는 길로 가는, 비극적인 인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잘못된 안도감 때문입니다.
막6:12-13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사실 여기 산 밑에 남아있던 제자들도, 과거에는 귀신을 쫒아낸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그때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 아버지의 간청을 듣고 귀신을 쫓아내기를 위해 시도했으나, 귀신을 내어 쫓지 못하고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을 때, 마침 산위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시고 난 후, 29절에 보면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현실에 안주하다가, 능력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머리 짤린 삼손과 같은 모습입니다.
산 밑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과거에 귀신 한번 고친 것을, 자신들이 획득한 능력으로 오해하고, 거짓된 안도감에 빠져 지속 반복하여 기도하지 않다가, 결과적으로 그 능력을 다 소멸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계속해서, 흘러가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교회공동체에는, 한 사람의 계속하는 기도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스코틀렌드를 변화시킨 존 낙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하는 한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
20세기 프랑스의 3대 작가 중 한사람으로 “장지아르”라는 작가를 들고 있습니다.
그가 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20여국에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엘지아르”는, 프로방스 지방의 양치기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들이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벌목하고, 함부로 자연을 다룸에 따라서, 그 지역은 죽음의 땅으로 황폐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 “엘지아르”는, 1913년부터 13년간 황무지가 된 땅에 도토리 10만개를 심었습니다.
그 중 2만개가 살아났습니다.
1946년 한 젊은이가 그 지역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은 울창한 수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생동감과 활력이 넘치고, 만 명의 인구가 그 지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묵묵히 나무를 심은 양치기 “엘지아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죽은 황폐한 마을이 활력이 넘치는 산악도시로 변해 있었다.”는, 이 책 줄거리의 내용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심어서 열매를 맺는 것이 비단 나무뿐이겠습니까?
복음과 기도와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짧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 하나에 무언가?”를,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하나에 10년간만, 투자해 보십시오.
반드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무를 심으면 나무가 열매를 맺고, 기도를 심으면 기도가 열매를 맺고, 복음을 심으면 복음이 열매 맺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안도감에 빠져 우리가 기도의 자리를 떠났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산 밑에 9명의 제자들처럼,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 보혈로 죄 문제를 해결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임을 믿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전심을 다해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회복하여, 복음을 심고, 기도를 심고, 사랑을 심고, 축복을 심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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