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로마서 1:16-17)

Johnangel 2023. 10. 6. 23:25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로마서 1:16-17)

                                             

“부끄러움”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성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하여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할 때 부끄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해야할 때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당당해야할 일을 부끄러워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뻔뻔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때문에 내가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전도에 있어서 사탄이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을 자극하고, 부끄러움을 자극해서 복음의 담대한 증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입을 통해 절대 복음의 능력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끝까지 우리의 입술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우리의 입술을 열어 주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이 두 양상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령 충만할 때는 사도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졌을 때는 입술이 닫히고 내향적이 되어 복음전파가 약해졌습니다.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유도, 그 당시 로마는 예수 믿는 자를 찾기가 쉽지 않은 때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당시 로마에 기독교 문화란 아예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소수의 예수 믿는 자들은, 대부분이 유대인 개종자들이나 노예나 천민 출신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이 로마의 거대한 세속적인 문화를 거스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절대능력의 복음을 가졌지만 로마의 화려함을 볼 때, 위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딤후1:7절에 보면,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디모데는 이미 성년이고, 목사이며, 복음전도자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아버지로서의 마음은, 혹시나 디모데가 세상 문화에 위축되어 복음전도자로서의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격려하고 훈계하는 의미에서, 8절에 보면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라”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었고, 3대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복음에 대해 담대해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입술을 열지 못하게 방해하고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입술을 담대하게 열기 위해서는 부끄러움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막8:36-38절에서 제자들에게 복음에 대한 부끄러움을 경고하셨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은 “부끄러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복음을 먼저 받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복음전도”대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입을 닫고 있을 때,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떠내려가는 인생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란 “자기 육체의 정욕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세대”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가치가 혼란스럽고 예수 믿는 자와 진리를 무시하고 도전하며 사사시대처럼 살았던 사람들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우리의 가치관을 공격하고 다수가 우리를 따르지 않는 시대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보다 똑똑하고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이 가진 사람 앞에서 본능적으로 위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 나도 너를 부끄러워하리라”고 엄청난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1. 복음의 절대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1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구원이며, 구원은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지옥의 사람을 천국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한 자는 복음을 속에 가두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상식을 깨뜨린다든지 무례하게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당신도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애정어린 소원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복음이 너무나도 좋은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나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 16절 말씀은, 로마교회 성도들이 숫자적으로 열세이고 문화적으로도 어렵지만,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는 영적 아버지로서의 사도바울의 마음입니다.

 

2. 믿음의 선배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던 믿음의 선배들을 다시 조명해보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교훈들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쓰고 있는 사도바울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구절을 써내려갈 때, 그의 뇌리에 꽉 붙잡혀 있는 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가 과거에 복음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등지고 도전하던 때,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어느 날 공회가 열렸는데 스데반 집사가 잡혀왔습니다.

공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보았는데, 행6:15절에 보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아도 천사의 얼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대적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오릅니다.

스데반이 입을 열어 구약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복음의 내용을 이야기 하자, 공회에 있던 자들이 더 이상 앉아서 들을 수 없어서 일어나 돌을 들어 스데반을 내리칩니다.

여기저기 깨지고 피투성이가 된 상황에서 스데반은, 행7:59-60절에 보면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행9:1절에 보면, 이때 사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닫고 나서, 그 일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고, 자기의 행동이 얼마나 나빴는가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스데반을 생각하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오늘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 초기에도 이기풍 목사님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복음을 거절하고 핍박했지만,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그들의 삶을 보고 복음을 깨달은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위해 청춘을 바친 선교사님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리할 때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취할 것이냐?” 아니면 “복음에 붙잡혀서 복음을 자랑하며 살 것이냐?”를 결정해야합니다.

히12:1절에 보면, 우리에게는 “복음을 자랑했던 구름떼와 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자기 삶을 기쁘게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들이 복음에 대해 입을 다물지 않고 담대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변방에 있을 때는, 복음이 부담이 되기도 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깊이 깨닫고 예수를 깊이 만나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가 아니라 자랑하는 자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 기회에 복음으로 여러분의 심령을 뒤집어엎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에 대한 감격이 내 영혼을 장악하고 주장하며 복음의 눈을 뜨는 기회가 되십시오.

“내가 주님 앞에 복음의 제물이 된다”는 마음의 자세로 열심히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을 강권하여 데려오십시오.

한번 찾아가서 안 되면 두 번 찾아가고, 두 번 찾아가서 안 되면 세 번, 네 번 찾아가 그들의 마음의 문빗장을 열어 그 영혼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도록 우리가 책임을 져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삼고초려가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복음의 영광스러운 말씀으로 내 영혼이 새로워지고, 회복되는 거룩한 역사가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에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