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뿌리가 깊은 사람 바나바 (사도행전 11:19-26)
바나바는 성경 인물 중에 최고의 인격자입니다.
그는 용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으며, 용서하는 사람이었고, 넉넉한 사람이었으며, 밝은 면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의 핍박으로 인하여 안디옥으로 피신한 평신도들이 그곳에서 이방인인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곳에 안디옥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안디옥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이 예루살렘교회에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조사위원으로 갔던 바나바가 그 안디옥교회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안디옥교회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나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칭의”라는 말로써, “완전한 의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며, 은혜입니다.
바나바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명확히 파악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의 약점만 붙들면, 아무도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바나바는 초신자들인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약점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따라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내가 문제요, 내가 병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초신자들에게서 약점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인격의 사람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에게는 영적인 깊은 뿌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그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24절을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영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말씀, 즉 생명에 뿌리를 내리고 속사람이 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성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요트는 바다에서 쉽게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오뚜기처럼 금방 바로 일어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트는 물속에 잠긴 부분이 물 위의 부분보다 훨씬 더 큰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트 바닥에 “바닥짐”이 있어서 이런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겉모습만 치중하고 “바닥짐(Ballast)”에 신경을 쓰지 않다보면, 평소에는 문제가 없지만, 어떤 시험을 만나면 금방 넘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신실한 믿음과 인격의 “바닥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자 맥도날드는 “영성”과 “영적체험”을 구분하여 “영성은 생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영적인 체험은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를 예를 들면, 예수님 부활 이전의 베드로의 모습은 영적체험의 모습이었지만, 예수님 부활 이후의 베드로의 모습은 영성의 모습입니다.
마26:33절을 보면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고, 마26:35절에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거듭해서 큰소리 쳤습니다.
물론 이때 베드로의 마음은, 거짓말로 큰소리 친 것이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할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을 때 곁에서 잠만 잤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에 대제사장 집의 계집종에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망신을 당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는 영적체험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체험의 단계는 의지와 결심은 있지만, 영성을 가진 자처럼 지속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3:16절에서 바울은 “그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속사람의 변화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영적체험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감정에 기반을 둡니다.
②훈련이 불필요합니다.
③생명의 말씀에 뿌리가 없기 때문에 잠깐 뿐임입니다.
④공허하고 피곤해집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에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감정에 기복으로 인하여 공허하고 피곤해진 칼 막스는 “기독교는 아편이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안티라고 불리는 반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한때는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생명의 말씀에 뿌리가 없고 감정에 기복으로 인하여 공허하고 피곤해진 결과 반기독교의 편에 서서 교회를 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의 특징은, 생명의 공급이 있습니다.
요1:4절을 읽겠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렇습니다.
영성은 생명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고, 생명의 공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영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불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전달되지 않으면 교통이 없습니다.
교통은 가슴이 통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교통이 이루어집니다.
사명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만나면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간절함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집니다.
따라서 간절함이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찬송을 부를 때도 간절함이 있을 때 그 감동이 모든 회중에게 전달됩니다.
옛말에 “안광이 지면을 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간절함으로 책을 볼 때 눈빛이 지면을 뚫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마귀가 역사하면, 청개구리처럼 반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뜨거워져야할 때 냉정해지자고 말하고, 차분해져야할 때 왜 이렇게 차가운가?”라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마11:16-17절을 읽겠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느끼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마귀의 영입니다.
따라서 남을 정죄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25-26절을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바나바는 바울과 손을 잡고 함께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영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사람을 변화시키겠다, 사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불타오르는 주님의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나바처럼 주님의 불타는 가슴을 소유하면 어떻게 변화될까요?
영광을 추구하게 됩니다.
영광은 가치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서할 때 가치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친절을 베풀고, 높은 자리와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버리고, 섬기는 자리, 종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였으며,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교회 안에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많으면, 우리 고현교회는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가 지은 “가지 않는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숲속에 두개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덜 간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였더니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제자훈련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육체의 삶에서 이탈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제자훈련은, 여러분을 가치 있는 자가 되게 하고, 영성을 가진 자가 되게 하고, 반드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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