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마태복음 9:35~10:1)

Johnangel 2015. 7. 10. 05:17

마태복음 9:35-10:1 존 울트버그는 그가 쓴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라는 책, 제1장에서 고슴도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늑대와 양, 코끼리, 까마귀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고슴도치는 무리를 짓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홀로 다닙니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면 그는 이웃에게 다가서지만, 문제는 이웃들과 함께 있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슴도치는 서로에게 너무나 쉽게 상처를 입히고 다시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바로 고슴도치의 딜레마이고, 바로 우리 인간의 딜레마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거부, 비난, 분노, 오만, 이기심, 시기, 경멸 등 무수한 작은 가시들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을 자기의 가시를 잘 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다가가면 여지없이 그 가시가 드러나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들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주변에는 가시투성이 고슴도치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만 고슴도치 인생이 아니라,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고슴도치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주고 상처받는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이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가 있을까요?

1. 상처받은 이웃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36절을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고 기진한 양들의 모습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상처받은 이웃들의 치유자가 되려면, 우선 그들의 고생하고 기진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자신들의 문제 속에만 너무 깊이 빠져 살아감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웃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사실 이웃들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골든 맥도날드(Gordon Mcdonald)목사는 우리 현대인의 삶의 유형에 대해 하나는 “소명에 의해 살아가는 삶”이 있고, 다른 하나는 “쫓겨 다니는 삶”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도 인식한지 못한 채로 그날그날을 충동적으로 쫓겨 다니며 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고통 받는 이웃들이 보일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웃들은 모두 나를 귀찮게 하는 존재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 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뉴욕에서 1,500여명의 관중 앞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었는데 강연이 끝나자 수백 명이 싸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있는데 까지 싸인을 서둘렀지만, 공항으로 가야할 시간이 임박해지자 싸인 시간을 단축하고 공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헐떡이며 공항 청사에 들어가 잠시 화장실 변기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틈으로 누군가가 자기가 쓴 책과 펜을 들이밀며 “박사님, 죄송하지만 싸인을 좀--”하더랍니다.

여러분,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로스 박사는 서둘러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이런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보고자 했는데 뜻밖에 수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을--”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수녀가 말을 가로채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니요?”하고 약간 퉁명한 소리로 반문했더니 수녀가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사실은 박사님, 저의 동료 수녀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는데요. 박사님을 너무나 만나고 싶어 했고, 박사님의 강연장에도 오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에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로 강사님의 강연을 녹음해 들려주고자 했고, 박사님의 친필 싸인이 있는 책을 선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사님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싸인을 받지 못하고 공항으로 왔는데 박사님이 저와 같은 비행기 출구에 같은 화장실에 들어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로스 박사는 약간의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며 “이웃을 치유하는 진정한 힘은 모든 상황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드리며 그 안에서 이웃을 바라볼 수 여유가 있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삶은 무엇보다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2. 상처받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웃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웃들을 주목하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웃들의 고통을 보고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속의 레위인처럼 그대로 그 곁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0:33절을 읽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이요, 양을 기르는 목자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단지 성경을 좀 많이 안다고 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자의 심정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함께 고통을 나누려면,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3. 상처받은 이웃 12명을 제자로 섬기셔야 합니다.

 

한 동안 교회는 제자사역을 신학을 전공하고 안수 받은 목사들만이 할 수 있는 사역이라고 잘못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 하나님은 소위 셀 교회 운동을 세계적으로 일으키시며 이런 사역의 주인공이 모든 성숙한 성도들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그 대열에 참여하여 셀 교회 운동을 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운동에서 여러분은 지금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교회 안에는 여러 많은 직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서리집사님, 여러 봉사팀장님들, 이 직분들은 모두 다 주님이 주신 귀한 직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직분은, 목장을 섬기는 셀리더들과 그 셀리더들을 섬기는 지역장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이 의도하신 그 중요한 일을 매주마다 고생하고 기진하는 영혼들과 씨름하고 그들을 돌아보며 계시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본문 36절에서 “목자 없이 방황하며 고생하고 기진한 영혼들을 불쌍하다”고 하신 주님은, 37-38절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영혼들을 거두어 드리도록 추수한 일군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라”고 부탁하신 후, 10:1절에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기 마태복음 9장의 마지막 부분이 10:1절에 연결되며 시사하는 교훈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목자 없는 양들처럼 고생하며 기진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들을 제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들의 할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아니 이 세상에 고생하고 기진해 있는 영혼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이 12명만 책임져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현의 성도 여러분!

12명도 많아 보이시면, 우선 내 주변에 힘들어하며 인생을 사는 3명과 만나 열린모임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3명에게 각각 또 3명만 데리고 오도록 해 보십시오.

그러면 12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셀 교회 운동가들은 12명을 가르쳐 기독교 기초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도 12명을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상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모범을 넘어서려는 만용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셀 모임을 통해 12명과 함께 고통하고 함께 기뻐하며 말씀과 기도로 삶을 나누어 보십시오.

거기서 함께 치유를 경험하고, 함께 비전을 회복하고, 함께 일어나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우리의 가정은 치유되고 익산은 변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셀 교회의 비전이요, 우리의 고현교회의 존재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고현교회의 성도들은 모두가 다 목자가 되는 비전을 가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이 일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은 그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28:19-20절에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시며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아-멘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고현교회와 여러분을 성령님은 황홀하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