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고난주간 (종려주일) 설교 원고 - 고통을 이기는 위로 (마가복음 14:32-42)

Johnangel 2017. 4. 3. 23:01

고통을 이기는 위로 (마가복음 14:32-42)


우리가 이 땅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고통에는 매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자질구레한 고통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예외적인 고통, 잔인하고 충격적인 고통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를 전후한 예수님의 고통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문자 그대로 그분은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겪으실 십자가의 잔인한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아시고, 그 고통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34절에 보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예수님은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잠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한다는 그 육체적 고통보다도, 더 심한 고통으로서, 죄를 모르신 예수님이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리셔야 한다는 수치스러운 고통, 혹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일시적이 나마 죄를 짊어지고 그분의 심판을 경험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고통, 혹은 십자가의 상황을 앞두고 주님이 사랑했던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감으로써 겪으셔야만 했었던 배신의 고통,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우리의 삶의 장에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어떻게 그 고통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33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려 가시면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우리 동양권의 문화는 체면문화가 많기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홀로 겪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물론 최악의 고통을 극복하는 그 모본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어떤 의도도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보다도 더 단순하게 인간적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도 사람이셨기 때문에, 이런 외로움과 고독한 상황, 그리고 고통스런 상황을 직면하시면서 그들을 통해 위로받고 싶어서 “제자들을 친구삼아 그 고통의 밤을 함께 지내고 싶어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친구를 알아볼 수가 있습니까?

내가 고통을 당할 때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봄으로써, 우리는 친구를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통은 우정의 테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 격언에 보면 “선경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친구를 시험한다”고 했고,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고난을 만나야 진정한 친구들을 우리는 알아본다”고 했고, 유명한 과학자였던 퀴리 부인은 “역경에 처할 때 우리들은 진정한 친구들의 숫자를 세어 볼 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잠17:17절에 보면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친구가 많은 것 같지만 “내가 정말 위기를 만났을 때 내 진짜 친구가 몇 명인가?”를 알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37절에 보면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고통스런 밤에 한 시간 동안만 좀 깨어 있어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주님은 그들에게 기도를 요구하셨지만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놀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친구로서의 자격이 없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직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가 다락방에서 마지막 대화를 나누면서, 요15:13절에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곁에 좋은 친구가 없어 외롭다고 느껴지시는 상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먼저 누군가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저는 이따금씩 어떤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너무나 견디기 어렵도록 사람들이 없는 쓸쓸한 장례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한 예외적인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쓸쓸한 장례식의 뒷얘기를, 우리 부목사님들에게 들어보면 그분이 평소에 다른 사람을 찾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둔감한 사람은, 나중에 자기가 가장 고독했던 상황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상담가요, 의사였던 스위스의 폰 트루니에가 쓴 책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 혹은 남편과 더불어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애정의 관계를 가질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해도 나를 비판하지 않고 내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몇 명의 친구만 있을 수 있다면, 당신의 인생의 장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요란해도 그 폭풍우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런 위로를 제자들을 통해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실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전히 그들의 친구가 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홀로 걷기에는 너무나 고독한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주변에 좋은 친구를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친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곳이 저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모든 사람이 내 친구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정말 마음이 통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인생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몇 사람만 사귀어도, 우리의 교회생활은 후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변에 그런 친구주시기를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위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친구들 사이의 위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로할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때로는 접근해서 말을 나누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의 아니게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위로하는 기술이 없어서, 우리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내가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또 남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경우들도 우리는 경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가 바로 욥의 친구들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위로한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욥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이럴 때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우리는 제자들이 주님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님이 취한 태도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35절에 보면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지 못하고, 마음을 함께 알아주지 못하자, 주님은 그들을 떠났습니다.

한문에 보면, 친구를 나타내는 말 가운데 “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기란 “내 마음을 알아준다, 내 고통을 알아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잠들어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된 거리에 가서”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이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36절을 보면 주님은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마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기대고 그분 앞에 자기의 절망, 자기의 고통, 자신의 아픔을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놓았습니다.

여러분, 기도란 무엇입니까?

조렌이라는 기독교 철학가는 기도를 정의하기를 “기도는 하나님 앞에 홀 로 서는 단독자의 체험”이라고 했고, 비전 칼리지의 학장인 제임스 휴스톤은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쏟아 놓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정말 고독하셨고, 외로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아직도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이 대목에서 요16:32절에 보면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자기 심정을 말씀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주님의 그 고독했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그 다음의 고백이 중요합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진정한 친구라 할지라도 따라오지 못하는 길이 있고, 부부라고 할지라도 함께 할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가 부부간에 사랑이 넘칠 때는 상대방에게 “여보, 우리 같이 죽읍시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죽음의 길을 건너갈 때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어떤 사고가 나서 같이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죽음의 다리를 우리는 홀로 건너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외로운 때에도, 내가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면 결코 우리는 고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배우려면 평소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오늘 같은 사건을 누가복음에서 읽어 보면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저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서 기도하셨다”

그렇습니다.

좋은 습관은 좋은 습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하는 것과 날마다 성경을 읽는 것과 큐티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정말 절실하게 하나님의 만져주심이 나에게 필요할 때, 그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나를 만져 주시고, 나를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 고통이 견딜만한 의미를 확신할 수만 있다면 뚫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내가 아무런 의미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 같다. 내 죽음이 어쩌면 개죽음일지 모른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것은 정말 비극입니다.

그래서 의미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36절을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저 잔인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맞아, 그것 때문에 나를 보내신 거야, 나는 십자가에 달려야 해, 그래야 내 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 문제를 해결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들 수가 있다”

아마도 주님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41절을 읽겠습니다.

“세 번째 오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저는 이때쯤 주님의 마음속에 어떤 확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완전히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 am ready. 나는 준비되었다. 일어나자. 가자 십자가로”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내 고통의 의미를 알면, 우리는 고통과 대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라”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불가사이한 그 어떤 고통도, 억울해 보이는 어떤 아픔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 결국은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도 우리의 삶의 장에서 주어지는 고통을 향해서 두려움없이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대결하여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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