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당신은 예수님의 관심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5:1-7)

Johnangel 2019. 4. 1. 14:31

당신은 예수님의 관심을 아십니까? (누가복음 15:1-7)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내 욕망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하기로 작정한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한없이 우리를 외로운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편리 외에는 아무 관심 없이 살면서도, 역설적으로는 이 세상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있다.”, 현실 때문에 처절한 외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세상 아무도 너에게 관심이 없어도 나만은 너에게 관심이 있다.”라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흔히 선한 목자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본문의어떤 목자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어떤 목자의 관심은 곧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어떤 관심일까요?

 

1.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극도의 개인주의시대이면서도, 오히려 개인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개인으로서 인정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숫자로 처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숫자로 기억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OO아파트 OOO동/OOOO호집 사람, OOO-OOOO 전화번호를 쓰고, 주민등록 앞자리 OOOOOO 이 숫자들은 모두 다 라는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이사를 간다든지, 전화를 바꾼다든지, 제가 세상을 떠나든지 하면 이 모든 숫자는 다시 저와 아무 상관없는 숫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나를 끝까지 잊지 않으시고, 나를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나를 구원하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4절을 보면 그 잃은 양을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설교로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느 날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던 사마리아 길을 가신 이유는 사마리아여인 한사람을 찾기 위해서였고, 그가 어느 날 여리고 길에서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던 이유는 삭개오라는 한사람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1: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모습을 증언하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개인적인 관심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사람들을 만나실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민족의 반역자가 아닌 삭개오야!, 죽은 친구가 아닌 나사로야!, 귀신들린 여인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그냥 마리아야! 라고, 각 자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동일하게 우리가 관심 있는 이웃들에게 우리이상의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하고자 하는 이웃들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이상으로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히 개인적이십니다.

 

2. 집중적인 관심입니다.


4절을 보면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찾는다.”는 단어가 중복되어 사용된 것은, 이 말씀을 하고 계신 예수님의 집념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반드시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린 이후, 이 목자의 유일한 관심은 오직 잃은 양 찾는 일이었습니다.

아침에도 찾고, 점심에도 찾고, 저녁에도 찾고, 밤에도 찾고, 우리에서 찾고, 우리 밖에서 찾고, 골목에서 찾고, 거리에서 찾고, 들에서 찾고, 동네에서 찾고, 시장에서 찾고, 직장에서 찾고, 어제도 찾았고, 오늘도 찾고, 내일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관심 때문에 어느 날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아십니까?

나 한사람을 찾기 위해 친구를 보내시고, 목사님을 보내시고, 선교사님을 보내시고,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분은 성령으로 내 마음을 두드리며, 내게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유일한 관심은, 나를 찾는 일이셨던 것입니다.

19:10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야망은 지식의 야망이고, 시저의 야망은 권력의 야망이고, 진시황제의 야망은 장수의 야망이고, 록펠러의 야망은 부의 야망이었다면, 예수님의 유일한 야망은 잃은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기도하던 중 갑자기 전에 읽었던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츠의 이야기가 마음에 떠오르면서, 마음에 큰 평화를 경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윌리암 부츠가 그의 구령사업과 복지사역이 확장되면서 여러 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초대를 받게 되자 그의 참모들은 여왕의 도움을 받을 기회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왕을 만났을 때 여왕이 그의 복지사업의 업적을 치하하면서 내가 도와줄 일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자, 윌리암 부츠는 전도자에게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 말고 무엇을 구할 일이 있겠습니까? 더 많은 영혼을 제가 구원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왕을 만나고 나온 그에게 참모들이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우리가 주님의 관심을 이행한다면 나머지는 그분이 책임지시지 않겠는가?”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그리고 우리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집중적인 관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집중하면, 나머지 우리교회의 모든 필요는 주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새생명축제, 즉 전도에 집중하기를 열망하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교회와 교인의 모든 관심이 집중할 수 있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는, 잃은 자식을 찾는 한 가지 관심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먹는 시간에도, 일하는 시간에도, 자는 시간에도 그 부모의 관심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기 목자의 관심이요, 예수님의 관심이요,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목자가 드디어 양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가 끝납니까?

아닙니다.

5-6절을 보면, 목자는 잃은 양을 찾은 후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돌아와 너무 기뻐서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립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매 주마다 여러분의 전도를 통해 불신자뿐만 아니라, 전에 믿다가 낙심한 많은 낙심자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전에 믿다가 낙심한 자들은 그들이 왜 낙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어쩌면 먼저 믿은 우리들이 그들을 향한 관심이 일회용 관심이었거나, 혹은 짧은 관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책임, 무관심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목자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목자는 아마 잃은 양을 찾아 두 어깨에 메고 난 이제 너를 놓을 수 없어. 넌 내꺼야. 내 집을 절대로 떠나지 않게 할꺼야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목자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관심이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품을 떠난 낙심한 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다시 찾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예수님이 말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 때문이었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근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당시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배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까?

18:10-11절을 읽겠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책임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입니다.

물론 그들은 죄인들이 돌아오면 받아주었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예배는 선민의 자만심이 고백되는 예배였고, 영혼의 구원의 기쁨이 결여된 예배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이웃들을 초청하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기뻐서 얼싸안고 춤추고, 기뻐하는 잔치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그런 기쁨을 우리교회의 예배 안에서 회복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관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찾기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구조공동체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양들은, 종종 마을공동체의 소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마을사람들은 양이 실종되었을 때, 공동의 노력으로 찾았고, 실종 된 양을 찾으면 잔치를 벌려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우리 모두 연합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이웃들을 찾기 위해 베스트를 작정합시다.

그들은 과거에 교회를 다니다가 낙심한 이웃들일수도 있고, 교회와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온 이웃들일수도 있고, 우리의 가족 친지들일수도 있고, 우리의 같은 아파트 이웃들일 수도 있고, 거래처의 이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이웃들이 누구인지 기도해 보십시오.

그가 바로 당신과 내가 찾아야 할, 하나님께서 잃은 그 양인 것입니다.

주님의 심정으로 그 잃은 양을 찾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