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다 버리고 떠나다 (사도행전 7:4-5)

Johnangel 2022. 6. 30. 08:12

다 버리고 떠나다 (사도행전 7:4-5)

 

지난 시간에 우리는 스데반집사가 유대인들에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다.”고, 강하게 도전해서 미움을 받았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는 “살아계신 영광의 하나님을 대면한 자”라고,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떤 모범을 두고 배울 것이냐? 어떤 것을 표준으로 삼아 비교할 것이냐?”하는, 물음에 교과서처럼, 제시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들의 일생입니다.

 

특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이,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그의 삶 전반에 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머리 숙여 하나님 앞에 “아버지”하고, 부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처럼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런 질문이 마음속에 전혀 없다면,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말씀에 순종하려고, 친구를 버렸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버려야할 때는 과감하게 버려야합니다.

여러분은 말씀에 순종하려고, 고향도 떠났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떠나야할 때는 떠나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아직도 그것이 잘 안 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직 아브라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버림”과 “떠남”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의 신앙은 장막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삶을 살기로 각오하고, 구별된 삶을 선택한 아브라함에게 장막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잠깐 여행하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동일한 약속을 받은 이삭, 그리고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5절에 보면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였으며”라고 했고, 11:9절에 보면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에도, 성을 쌓는 민족이 많았고, 좋은 집과 토지를 소유한 부족도 많았습니다.

사실 아브라함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발 붙일만한 땅”도, 소유한 일이 없습니다.

 

23:1-4절에 보면, 헷 족속에게 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매장지를 나에게 주어 내 앞에서 내어다가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시오.”하고, 말할 정도로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낼 매장지조차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것으로, 소유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상식이라면, 아브라함은 나그네였기 때문에, 어찌 생각하면 “특별히 자기 보호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 고향을 떠난 사람이니 내 주변에는 나를 보호해 줄만한 사람도 없구나! 다른 사람보다 성도 더 튼튼히, 집도 더 크게 지어서 모든 위협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붙들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이러한 심정을 “여호와는 나의 요새요,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라고, 시편 곳곳에서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브라함의 요새였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와도, 하나님이 그의 성이요, 방패요, 피할 바위가 되셨습니다.

 

여기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했다.”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그저 나그네 생활에 필요한 것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물질에 애착이 없었습니다.

재산 문제로 조카 롯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자기 권리를 깨끗이 포기하였습니다.

미련 없이 양보하고 롯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장막생활 정신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믿음은, 땅의 축복은 못 받아도 좋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성별된 삶이 되면,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보물을 하늘에 쌓게 됩니다.

땅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땅 위에다 무엇을 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땅 위의 그 무엇에도, 내 안전을 의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장막생활 정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가장 물들기 쉬운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물질욕, 소유욕입니다.

물론 내가 “물질을 얼마만큼 가져야겠다.”는, 생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소유하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물질에 더 마음이 끌릴 때는, 그 물질은 나를 범죄 하게 만드는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딤전6: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인 천국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장막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회개해야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1,200만이나 되면서도, 왜 세상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장막생활 정신을 우리가 다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세상의 정욕과 물질에 욕심이 많습니다.

세상의 정욕과 물질에서 마음이 떠나야합니다.

얼마를 소유했든 간에 물질에 속박당하고 물질에 노예가 되면, 그는 이미 이 땅에 성을 쌓은 사람이요, 땅 위에 곳간을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나라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며, 때로는 “물질이 적어서 남에게 멸시 당하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갖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 자녀로서의 긍지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물질을 많아 가져서, 남에게 대우받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서의 긍지입니까?

예수는 잘 믿고 있는데, 물질적인 축복이 없는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나그네라고 하는 정체성을 상실한 채, 이 땅을 영원한 거주지처럼 생각하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땅의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은혜가 들어갑니까?

만약 우리대한민국의 1,200만 성도가 물질에 붙은 마음을 완전히 떼어내고 자유인이 된다면, 대한민국에 놀라운 혁명과 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다 아브라함처럼, 장막생활을 각오하고, 물질에 묶인 마음이 해방되기만 한다면,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 뜻대로 살기 원한다면, 반드시 우리 대한민국은 달라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헷 자손, 여부스 자손, 등. 주변 족속들과 공존하며 살았지만,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르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도 “아브라함은 가치관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과, 구별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3. 아브라함의 신앙은, 믿음의 눈으로 멀리 내다보는 신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시종일관 믿음 하나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음, 믿음”하지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너에게 주고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아지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멘”하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깨끗하였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어 노년에 간신히 아들 하나 얻어서 금이야 옥이야 키우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어떻게 그런 믿음이 가능했을까요?

세상과 섞여 흙탕물이 된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나그네가 되어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땅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할 것이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이 믿음 없이 받아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아브라함은 평생 아들 이삭 하나 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 죽을 때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해, 11:13절에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내다보고 죽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야겠지만, 그런데 사실 잘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냥 믿음이 사시나무 떨듯 요동합니다.

내가 간구한 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의 뿌리가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비하면, 너무나 경박한 믿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평생 동안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굉장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환경이 바뀌거나, 어떤 믿음의 시련을 당하게 되면, 내 믿음이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지 스스로 검토해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마음의 불순물이 사라져야합니다.

믿음에 섞여 있는 불순물을 다 걸러 내야합니다.

 

불순물이 무엇인지는, 우리 자신이 잘 알지 않습니까?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걸러 내야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눈으로 보지 않고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어려움과 시련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썩은 울타리처럼 맥없이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