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2-14)

Johnangel 2023. 11. 22. 18:18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편 116:12-14)

                                                    

시편 116편의 말씀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인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은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시116:1-2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이 시인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환난에서 건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응답하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7:7-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그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마음의 소원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우리를 도와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십시오.

시116:3절에 보면, 그가 당했던 경험을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늘 때”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말하면 사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사망의 줄이 두를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사망의 줄이 그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결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그들은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지지 아니하는 음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뜨거운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 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기 때문에 다니엘은 상처하나 입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 서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 얻는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도 본문의 시인처럼 “하나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님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주님께 “내가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요?”라는 고백을 드립시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이민교 선교사가 쓴 “복음의 빚진 사람”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원불교 법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원불교의 도를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원불교 가정에서 태어나 고아와 장애인에게 온 마음을 쏟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교무(원불교 교역자)가 될 재목이었고, 원불교 정녀인 누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3학년 때 소록도를 방문한 후 아예 원불교 전도사를 자임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7년 후 소록도 법당에서 염불하던 중에 성령에 감동되어 소록도 문둥병자들의 장례식마다 참석하여 들었던 606장의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찬송이 방언과 함께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습니다.

그는 그 즉시 몸부림을 치며 울고 또 울며 회심하고 “기독교 전도사”로 대변신을 하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소록도에서 문둥병자들을 돌보며 온 정성을 다해 부처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원불교의 도를 전하는 자기를 더 불쌍히 여기며 “예수 믿으면 문둥이도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소록도 문둥병자인 성도들의 기도응답으로 만들어진 기독교 전도사가 된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이 되어 사도로 불러주신 것에 감사하여 스스로 “복음의 빚진 자”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예수 믿게 하심에 감격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약사로 일하던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무슬림 지역인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선교사로 나가 지금 활발하게 선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인가? 내가 한센병 환자를 통해 예수님께 전염되었듯이 우리들이 고백하는 예수님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전염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하며 소록도 영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1.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라는 것입니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은 부처를 전하려는 이 젊은이에게 오히려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행복하고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내가 문둥이가 아니었다면 예수 믿지 않았을 텐데 하나님이 나를 나병환자로 만들어 주셔서 내가 예수를 믿었다. 그것이 매우 감사하고 행복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병환자들의 “지금의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에 감사하다.”는 그들의 고백이 자기를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민교 선교사는 말하기를 “그들은 자신이 문둥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사실을 뛰어넘어 무려 50년이 넘도록 소록도에서 갇혀 살면서 나는 행복하다는 감사가 흘러나온다. 문둥이라는 소리를 듣는데도 그것을 오히려 은혜와 감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할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2. 오직 하늘나라에서 받을 면류관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소록도 사람들은 이 땅에 소원을 둔 것이 아니라 저 천국에서 받게 될 면류관이라는 상급을 바라는 신앙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면류관을 사모하는 신앙은 단순하게 구원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이생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면류관을 사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록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면류관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빨리 죽기를 바라는 것은, 한센병이 걸린 이생의 힘들어서가 아니라 빨리 상을 받고 싶어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면류관을 사모하다가 맞이하는 장례식은 오히려 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목표삼아야 할 신앙의 태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면류관을 향해 달음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잘 죽어야 합니다.

서로 잘 죽자고 인사합시다.

“면류관을 향해 서로 죽음을 경주합시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목사라는 직분을 주신 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예수님만 짊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나 서리집사와 같은 직분은 계급장을 단 것이 아닙니다.

사실 “진짜 특공대”에게는 계급장이 없듯이 우리는 모두 생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하나님 나라의 특공대일 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사울이 바울이 된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다가 올바른 죽음을 맞는다면 한국교회가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고 세계열방이 살아날 것을 확신합니다.

 

3. 나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소록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비록 한센병 환자이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일이라면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산다. 그들이 스스로 한센병 환자가 될 것을 결정한 것이 아니듯 예수 믿게 된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들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과 면류관을 사모하는 모든 영성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정의해놓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믿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예수님은 자기 방법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믿고 사셨습니다.

이것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믿음 있는 자를 찾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 내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지 말고 예수님이 믿었던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민교 선교사는 이 책에서 “소록도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이지만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았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맺은 열매요 또 다른 사과나무 한 그루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민교 목사님은 소록도가 만들어낸 하늘 작품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달란트 비유를 통해 “무엇을 남겼느냐?”고 묻습니다.

세상 장사꾼은 돈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하늘 장사꾼은 우리는 무엇을 남겨야 할까요?

나는 사람을 남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얼마를 남겼느냐?”고 묻는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열매를 얼마나 남겼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달란트로 무엇을 남기셨습니까?

다른데 정신이 팔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을 남깁시다.

그 일을 위해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생명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여 사람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