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요한복음 5:1-15)

Johnangel 2024. 3. 3. 16:22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 (요한복음 5:1-15)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자력으로는 치유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기적을 통해 고침받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최악의 난치의 병으로 고생하던 38년 동안 질병을 앓고 있던 한 병자를 고치심으로, 동일한 기다림을 안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시간을 초월하는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능력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질병을 앓고 있었든지,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이 문제 가운데 있었든지,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가운데 빠져 있었든지, 얼마나 오랫동안 불신가운데 있었든지,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적의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과 제가 만나야 할 이웃들은 도대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그들은 모두 자력으로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여기에서 언급하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병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38년 된 병자의 절망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접근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들어보면, 7절에 보면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고백 속에서,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웃들에게도 분명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가 자력으로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상태가 “우리가 만나야할 믿지 않는 이웃들의 영적상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다 영적으로 맹인이요, 귀머거리요, 앉은뱅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자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며,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없고,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분명히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전적으로 구원 불가능의 존재”라고 했고, 바울은 롬5:6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연약할 때”라는 표현은, 본래 “무력한 때”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들 자신의 구원에 관해서 전적으로 무력한 자리에 있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이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제가 오늘 만나야 할 이웃들은 “그들 스스로의 자력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그들은 모두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각양각색의 병자들이 그들의 치유를 희망하며 누워 있었던 곳이 베데스다 못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베데스다의 뜻을 아십니까?

그것은 “자비의 연못, 은혜의 연못”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기 “38년 된 병자가 치유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를 보시고,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고백하는, 그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치유는, 곧 “그의 전인격적인 구원의 그림자”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한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것은 모두 다 “자기가 노력하여 얻는 구원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거짓된 희망”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엡2: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이 은혜로만 구원될 수 있는 사람들, 이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이웃들이 지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보십시오.

7절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절망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고백 밑바탕에서, 우리 이웃사람들이 은혜를 갈구하고 있는 애절한 신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은 은혜로만 치유될 수 있는 이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이렇게 치유를 기다리며 절망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여러분과 제가 바로 이 은혜소식의 전달자요, 축복의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3. 그렇다면 치유의 희망 없이 인생을 사는,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절을 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 이 병자에게 찾아온 예수님은, 이 병자를 보시자마자 “그의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그를 붙들고 있는 절망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 다 알고 있는 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이 한마디로 그를 일으켜 세우시고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아가게 하실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성을 지니신 구원자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증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부터 계신 창조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길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인생은, 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를 만나지 않고는 인생은, 하나님께 나아 올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죄인인 우리 인생이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우리대신 우리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여기 베데스다 연못, 그 자비의 연못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반드시 양문을 통과해야만 했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여기 양문은 제사장들이 속죄의 제사에 사용할 양들을 가지고 통과하는 문이었습니다.

피 흘리고 죽어갈 그 어린양의 죽음의 사실을 믿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의 연못에 나타난 예수님, 그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베데스다의 연못가에서 절망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 흑인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하기 하루 전날, 백인들만의 권력체제가 무너지고, 인종차별이 없는 자유를 얻게 된 군중들이 만델라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기쁨에 들떠있을 때, 대기석에서 기도하던 “제시 놀만”이라는 흑인 여가수가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그녀는 과거 노예상인이었으나 회개하고 구원받아 노예해방을 위해 일하면서, 복음전도자가 된 “존 뉴턴”이 작사한 305장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2절이 끝나자 그곳에 사람들은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졌습니다.

어이서 3절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잊혀졌던, 이 찬송을 눈물을 흘리면서 함께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노래가 끝났을 때 그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고, 깊은 적막 속에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 기자는 그날 그곳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날 “제시 놀만”의 노래는 “다음 주일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날 “제시 놀만”의 노래 속에 증거 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병들고 상처 난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번 “행복나눔축제”기간 동안 우리교회에서 내 가슴과,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들의 가슴에 이런 치유의 은혜와 감격이 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