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 (로마서1:16-17)

Johnangel 2024. 6. 29. 14:27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 (로마서1:16-17)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며, 복음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신칭의”를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부터 생각헤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나에게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의가 있습니까? 자신이 의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롬3:10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요14:6절에 보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행4: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복음의 실체가 잘못 이해되면, 예수 믿는 사람의 오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는지를 바로 인식한다면, 복음의 그야말로 복된 소식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 같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보다 놀라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복음이 자랑이 됩니다.

복음을 영어로 “굿 뉴스”라고 합니다.

왜 복음이 좋은 식입니까?

복음을 헬라어로는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데, 당시 이 말이 쓰인 상황을 보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전쟁이 터지면 기자들이 달려가 관련기사를 신속하게 전송합니다.

심지어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전쟁 현장을 중계하는 시대입니다.

전쟁의 경과를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우리 편이 이기면 기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2천 년 전에는 전쟁이 났을 경우 성읍 사이에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었습니다.

가족이 전쟁터에 나간 지 3개월 혹은 6개월이 지나도 전쟁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누군가 헐레벌떡 성문을 열고 뛰어와 “우리가 이겼다”고 외치면, 이것이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질 경우 패전국 사람들은 이긴 나라에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기면 노예가 될 필요가 없으며, 상대 나라에서 전리품을 가져올 수도 있었습니다.

나라가 부요해 지는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에서 이겼음을 알리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것은 이처럼 승리의 소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승리, 죄로부터의 승리, 심판으로부터의 승리를 이룬 소식이기에 복음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내가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님께서 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을 힘입어 이제부터 의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구원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의로워졌음을 믿습니다.”라고 우리가 고백하면서도 삶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 자신이 주님 안에서 새로워졌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개 오래되고 헌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은 누가 몰래 차에 흠집을 내놓아도 크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 차를 가진 사람은 주차하는데도 신경 쓰고, 차에 조금만 때가 묻어도 닦습니다.

왜냐하면 새 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 차를 구입하고도 아무 것에나 주차하고 누가 발로 차면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 차의 주인이 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변화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을 샀는데, 100억 원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는 공사장에서 잡역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100억 원 가지고 무엇을 할 예정입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은 좋은 자동차도 사고, 좋은 양복도 살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산후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사람들이 물었더니, 그는 공사장으로 일하러 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품팔이를 계속한다면, 그 사람은 100억 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서도 그 구원의 가치를 모르면,우리는 이전과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구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롬12;1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의인으로 선택되었으니,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의롭게 만들어 주셨고, 그러하기에 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이처럼 간단한데, 이 복음을 놓고서 왜 교회가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습니까?

교권다툼은 차지하고 교리문제만을 다룬다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요체와,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성화의 의무를 떼어 놓으면 교파가 자꾸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면, 카톨릭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위대한 교부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로워졌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경대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면만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복음이 그 본질에서 멀어져 버렸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선행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으므로, 선행을 하지 못한데 대한 면죄부를 돈을 내고 사면, 그 돈으로 하나님의 예배당을 짓는 일에 참여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틴 루터가 본문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개신교를 시작했습니다.

가톨릭이 시계의 추를 “행함”이라는 쪽의 끝으로 가져다 놓은 것을 루터가 “믿음”쪽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이 행함만을 강조한 것처럼 루터는 강조한 나머지 야고보서처럼 행함을 강조하는 책은 성경에서 빼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보다 후발주자인 제네바의 개혁가 칼뱅은 장로교의 핵심교리로 믿음과 상화를 동시에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뱅의 예정론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행하는 고백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즉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고 보니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나를 미리 예정하시고 택하셨음을 깨닫게 된 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이와 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나를 전도하지 않았다면 내가 예수님을 몰랐을 텐데, 그 우연한 사건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고, 구원을 얻고 보니 실은 바울의 고백처럼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택정하신 것이었다고 우리 역시 고백합니다.

하지만 칼뱅이 죽고 난 뒤 칼뱅주의자들이 이 예정론을 극단화 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부터 사람을 O표와 X표로 구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애당초 X표인 사람은 구원맏지 못한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아무리 방탄한 삶을 살아도 애당초 O표인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구태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영적으로 나태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위슬러의 감리교는 상대적으로 행함을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거룩한 삶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감리교가 행함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의 의지, 인간의 결단이 부각되고 성령님의 공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결교와 침례교가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되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강조하다 보니 인간의 책임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은 아직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세 가지를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지, 정, 의입니다.

“지”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에 바른 깨우침, 바른 인식입니다.

“정”은 감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 즉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의”는 나의 의지로 복음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교파분열이 왜 생깁니까?

2천 년 동안 시기적으로 볼 때 이쪽이 강조하면 상대적으로 저쪽을 이야기 하는 교파가 나오고, 저쪽이 강조되면 이쪽을 보완하기 위해 또 다른 교파가 생긴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그러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함께 있으면, 이것이 정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둘을 떼어 놓고 어느 한쪽을 강조하다 보니 교파가 자꾸 분열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교파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죄인이었지만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구원해 주시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에, 이 시간 이후부터 거룩한 삶을 행함으로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됩니다.

 

예수님은 요14:21절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자”는 “믿는 자”와 똑같은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믿는 자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일 수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처럼 똑같은 것입니다.

믿기 때문에 행해야 하고, 행함으로 믿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신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