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 (로마서1:16-17)

Johnangel 2024. 6. 24. 18: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1) (로마서1:16-17)

                                              

오늘 말씀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이 증언을 한 시대에는 로마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장악했음에도 라틴어보다 헬라어가 더 통용되었습니다.

즉 헬라의 철학과 전통이 여전히 지배라던 시대였습니다.

한편 로마제국은 철저하게 권력과 무력을 신봉해 힘의 철학이 병존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도 바울이 주장한 복음, 곧 갈릴리에 살고 있던 예수라는 목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이 추구하던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전통에 비추어 본다면,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자랑했습니다.

 

왜 복음이 자랑거리입니까?

바울은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히브리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로부터 자유, 심판으로부터 자유, 죽음으로부터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 외에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인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외 없이 모두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이신칭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를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으며, 복음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신칭의”를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부터 생각헤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면, 나에게 복음이 필요 없습니다.

혼자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의가 있습니까?

자신이 의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롬3:10절을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범죄”와 “죄”를 구별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내가 법을 위반하여 그 결과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죄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법률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사람은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질러야 죄인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거꾸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즉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범죄가 드러난 죄인이고, 우리는 아직까지 범죄가 드러나지 않은 죄인입니다.

이것이 다를 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적인 죄인이냐 비도덕적인 죄인이냐, 이 차이밖에 없습니다.

모두 죄인인데 어떤 사람은 더 죄를 지었고, 어떤 사람은 아직까지 죄를 덜 죄를 지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정말 죄인이 아니라면, 자기 안에 증오나 추한 생각이나 음욕 등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성이 죄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서는 순간에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지시고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제기 됩니다.

왜 예수님만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까?

왜 석가모니와 공자는 안 됩니까?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이 없을까요?

믿음이란 “말씀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성경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이해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마1:21절은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는데,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세주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가 너희 죄로 인해 죽는다.”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사랑, 의리, 우정 때문이 아닌 “죄 때문에 죽는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가 공자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죄오 인해 죽고자 이 땅에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1:29절을 보면, 요한 예수님의 나아오심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리스도”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대속되도록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둘째, 요11:25-26절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와 공자는 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경할만한 삶을 살았지만,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그들에게는 거대한 무덤이 남아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는 무덤이 없습니다.

화장해서 재가 되었거나 무덤 속에서 그 시체가 썩어버린 유한한 존재가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왜 중요합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이 오늘날까지 효력을 갖습니다.

약속한 사람이 죽으면 그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그분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다시 몸으로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 속에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셋째, 마16:1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여인의 몸에 잉태되어, 외양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구유가 장식용으로 부잣집 거실에 놓이기도 하지만, 사실 구유는 더럽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 비천한 사람도 짐승의 거처에서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누가 위로하며 눈물을 닦아 줍니까?

우리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오시되 짐승의 구유에 처음 누우셨고, 가장 못사는 달동네 갈릴리에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밑바닥에서 아픔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30년간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우리가 어떤 고통가운데 있다 해도 그분은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실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눅1:35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 육체를 통해 태어날 아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세상과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아십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께서 과부와 고아, 나그네의 친구로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심령은 잘 이해하지시만 지위가 높은 사람은 이해하시지 못할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대통령의 고민도 아시고, 책임자 격인 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도 아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아랫사람들에게 욕먹는 아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모두를 수용하실 수 있습니다.

 

넷째, 마1: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개의 새끼는 개입니다.

소의 새끼는 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의 속성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신 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내 속마음과 모든 아픔을 이해하시는 참인간이십니다.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모든 삶의 문제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 도우심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우심입니다.

또 나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살다간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