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하나님의 진노(1) (로마서 1:18-25)

Johnangel 2024. 7. 1. 17:17

하나님의 진노(1) (로마서 1:18-25)

 

성경은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눕니다.

 

첫째는, “형이상학적 인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본능적 인간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배만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쾌락, 욕망 등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 즉 인간의 본능을 최고의 가치, 최고의 목표로 삼는 사람입니다.

창2:19절은 “하나님께서 동물도 사람처럼 흙으로 지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살 때는 동물과 별 차이가 없게 됩니다.

흔히 본능적 인간을 가리켜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 짐승이 이 말을 들으면 대단히 억울할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강간이라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욕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파괴합니다.

그러고도 야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짐승들이 새끼를 사랑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새끼를 보호하는 모습은 가히 경외심을 느낄 만합니다.

반면 자기 본능대로 사는 인간이 짐승만큼 사랑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먹을 것에 대한 욕망 앞에서도 짐승과 인간은 상반된 모습을 보입니다.

짐승은 배부를 때는 먹이를 쌓아두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만 찾아서 먹습니다.

반대로 본능적인 인간은 아무리 배불러도 먹을 것이 썩어 없어질지언정 쌓아 두어야 합니다.

먹을 것을 탐하는 욕망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인간이 이렇듯 자기 본능대로만 살면 버러지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인간은 성경에 나오는 소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소돔에 오자, 소돔의 남자들이 롯의 집에 모여들어 그 사람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롯에게 “우리가 상관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말은, 남색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돔사람들이 곤비해서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 집의 문을 찾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눈이 멀어도 좋으니 욕망만 풀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는, “형이상학적 인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철학적 인간입니다.

형이하학적 인간이 육체의 본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반면, 형이상학적 인간은 인간의 정신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도덕과 윤리를 앞세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형이상학적 인간이 형이하학적 인간보다 훨씬 고매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형이상학적 차원에만 머물면 두 가지 문제점이 파생합니다.

 

하나는, 자기 스스로 도덕과 윤리를 판단하여 자기 의를 과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접촉점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도덕적인 죄인과 비도덕적인 죄인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인 삶을 살아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됩니다.

도덕과 윤리는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가면 반드시 세상의 영향을 다시 받게 됩니다.

이것이 도덕주의자들이 지닌 한계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제가 어릴 때는 아버님께서 말씀하시면 무릎을 꿇고 들어야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며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형이상학적인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도덕과 윤리로 무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세상에 의해 오염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소돔에 사는 롯이 해당됩니다.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찾아와서 손님들을 상관하기 위해 내놓으라고 할 때, 롯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면서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다음 롯이 제시한 대안이 무엇입니까?

자기에 처녀 딸 둘이 있는데, 이 딸들을 줄 테니 그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롯이 소돔에서 살다보니 소돔식 도덕주의자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소돔식 도덕은 남자끼리 성관계를 갖는 것은 죄이고, 남자와 여자가 불의하게 관계를 갖는 것은 죄로 생각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영적 인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적 인간입니다.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이라는 토대 위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해당됩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말씀에 근거하여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반드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을 믿고 바쳤습니다.

만일 그때 아브라함이 형이하학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모리아산에서의 아브라함은 있을 수 없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들입니까?

형이하학적 인간, 형이상학적 인간, 영적인 인간, 이 세 범주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때는 대단히 영적인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지극히 본능적이고, 또 어떤 때는 철학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한다면, 우리는 영적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 롬1:18-32절은 본능적으로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사람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은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형이하학적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떠한지 전해 주고 있습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바로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서는 구원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당신이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진노하시는 하나님, 진멸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신약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입니까?

초대교회 때에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과 신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구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약 중에서도 사복음서와 바울이 쓴 바울 서신만 인정했습니다.

이 이단 때문에 교회가 모여 성경 66권을 정경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다른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단호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진노하십니다.

구약은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시면서 대신 당신의 아들을 진노의 대상으로 삼아 제물로 죽이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소 감격적인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보배로운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바로 깨달을 때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그분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면,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가 퇴색되고 무의미해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