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성탄절 설교원고 - 성탄을 기뻐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2:14)

Johnangel 2017. 12. 19. 15:46

성탄절 설교원고 - 성탄을 기뻐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2:14)        

                                                   

제임스 케네디 목사님은 그가 쓴 “예수가 만약 태어나지 않았다면”이라는 책에서 “매년 다가오는 성탄절의 가장 큰 비극은 상업화된 성탄절이 아니라 이제는 아무도 그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성탄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오늘 2000년 전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탄을 통해 우리가 받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시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죄악의 무거운 짐을 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과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으신지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처소를 예비한 후 곧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뿐이지,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하나님은 원래 본체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 베들레헴 마을의 구석진 곳에 있는 마구간을 택하셨습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아구스도는 탁월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로마제국이 무질서하다”는 것을 알고 “로마제국과 식민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호적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실 하나님이 로마제국 아구스도 황제를 통해, 미가서 5:2절의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을 성취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가 되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아구스도 황제를 사용하여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 호적은 성명과 직업 그리고 친척관계를 적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한 때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만삭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 동네에서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까지 여러 날을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한 사람 요셉의 부부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베들레헴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요, 또한 그 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의 인심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여관이란 시설이 몇 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은 “빈방 있습니까? 빈방 있습니까?”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애타게 빈방을 찾았지만,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의 아내 마리아가 언제 해산할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던, 요셉이 얼마나 빈방 하나 구하기를 원했겠습니까?

그러나 빈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찬이슬을 맞지 않기 위해서 찾아간 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마리아는 갑자기 산기가 느껴지면서, 애를 낳아야 되는 긴박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짐승의 먹이를 담아주던 구유를 털어서 적당히 깨끗하게 한 다음 거기에다가 자기 몸에 걸치고 온 헤어진 겉옷을 깔고, 그 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부랴부랴 옆에 있는 집으로 달려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와서 아내를 수발하고, 태어난 그 아이를 씻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태어나는 장면이었고, 장소였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가 소를 키우셨기 때문에, 외양간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냄새가 고약합니다.

더럽고 추악한 곳입니다.

오만 가지 기생충들이 기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우리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마음에 담긴 사랑을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을 일컬어서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구원자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을 만들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아름다운 파트너, 항상 보아도 사랑스러운 파트너를 갖고 싶어서 우리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 의도를 차 버리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모두가 제 마음대로 가버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버린 죄로 인하여 우리 인간은 일평생 저주를 받아 근심하며 수고하면서 살아도 나중에는 슬픔 밖에 남지 않는 허무한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이 제 마음대로 산 죄 값을 짊어지고, 영원히 저주를 받아야 될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셨습니다.

눅16장에서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날마다 문밖에 나와 탕자를 기다리신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면, 저 인간들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들까? 어떻게 하면 저 인간들이 나를 섬기는 것을, 가장 큰 인생의 기쁨으로 여기게 할까? 어떻게 하면 저 인간들이 나하고 교제하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 원래의 의도대로 우리 사람들을 바꾸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일은 하나님이 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서는 되지 않고, 자신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으로 가야만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야지” 결단시고, 그 거룩한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그 권세와 능력과 아름다운 옷을 벗어 던지고, 친히 베들레헴 말구유에 인간의 몸을 입고 천한 모습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누구나 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을 흘려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하는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를 구원하실 구원자가 세상에 임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에게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낙심이 아니라 소망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행복으로 느끼는 거룩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이 어찌 우리에게 큰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놓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 춤을 추며 그를 영접했습니까?

아닙니다.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영접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된 성탄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의 숫자는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탄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고 “누가 구주로 오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으며, 그를 영접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세상에 낮아지시는데 더 이상 낮아지실 자리가 없어서 짐승들이 사는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의 먹이통 구유에 누어계신 아기 예수를 생각합시다.

이제는 우리 몸이 예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고, 성령님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릇이 되어 거룩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갑시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목자들처럼, 마리아처럼,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자 예수님의 탄생을 이번 성탄절 오전 11시에 온 가족과 함께 교회에 오셔서 기쁨으로 성탄축하 감사예배를 통해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