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예루살렘 교회에 대 부흥이 일어나다 (사도행전 5:12-16)

Johnangel 2022. 5. 6. 16:10

예루살렘 교회에 대 부흥이 일어나다 (사도행전 5:12-16)

 

예루살렘 교회에, 대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대 부흥이었습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예루살렘 교회 부흥의 불길이 얼마나 맹렬했는지,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위력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부흥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2-16까지의 짤막한 말씀은, 당시 그들이 체험했던 대 부흥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이 시간에는 예루살렘교회에 임한, 대 부흥의 요소들을 검토해 보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부흥이 필요한지, 또 지금 우리가 이와 같은 부흥기에 있는지, 아니면 영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보겠습니다.

 

1.예루살렘 교회의 대 부흥의 첫째 요소는 표적과 기사입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굉장한 이적과 기사들을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와 같은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의 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으면 아무나 표적과 기사를 일으킨다.”는, 생각이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표적과 기사는, 하나님이 어떤 목적, 곧 대 부흥을 위해, 특별히 허락하신 것이지, 기도를 열심히 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그림자가 지나갈 때 “환자를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고, 표적을 구하며, 금식하고 기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19년부터 1921년 사이, 하나님은 김익두 목사님을 특별히 쓰셨습니다.

당시 한일합병으로 민족적 기운이 꺾이고, 많은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칠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간간이 이적과 기사를 나타냈습니다.

경산에 있는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이라든지, 사월리교회에 혈루증을 앓던 여성도를 고친 사건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장로교 헌법에는 “금일에는 이적을 행하는 권능이 정지 되었느니라.”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에는 사도행전과 4복음서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가 정지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적과 기사를 운운하는 것은, 이미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익두 목사를 통해,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자, 결국 1923년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에서는 이 조항을 수정하기로 결의하고 “정지되었다.”는 조항을 “지금도 이적과 기사가 있을 수 있다.”라고, 고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대 부흥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이적과 기사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이적과 기사라면, 그것은 영적 고갈에 빠져 있는 21세기 교회에 주시는 부흥의 계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적과 기사를, 전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적과 기사를 함부로 행하시지도 않는 분이요, 그와 같은 은혜를 함부로 주시지도 않는 분이기 때문에, 아무나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사가 나오는 성경구절을 근거로 이적을 행하고자 한다면, 성도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는 병을 앓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살다가 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를 그렇게 우습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이적과 기사는,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적과 기사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사람에 관한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당하는 사람이 다 나음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과 질병의 관계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신자를 혼란에 빠뜨려 왔기 때문에, 여기서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당시 헬라문화권에 속한 이방 사람들과, 애굽문화권에 속한 이방 사람들은, 귀신과 질병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무속신앙, 토속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모든 질병은 귀신에게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혼이 떠돌아다니다가, 사람에게 붙어서 발병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심지어 몸의 각 부분마다, 귀신이 와서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고대 헬라문화권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던, 질병에 대한 통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나라 토속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이 붙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귀신론과 질병에 대한 주장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독교 안에 들어와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 쫓는 일, 병 고치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어느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건강이 좋지 않은 때였는데, 소위 “불 받았다.”고, 하는 어떤 집사가 오더니 안수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나서 하는 말이 “이 집 조상귀신이 붙어서 병이 난 것”이라고 말하며, “그 조상의 죄 때문에, 아무래도 이 가정에 앞으로도 우환이 많을 테니까 특별기도를 해야겠다.”는, 말을 했답니다.

 

이 성도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러자 믿지 않는 남편이 “그러면 기도나 예배할 것 없이 아예 굿을 하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만약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굿하는 무당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2.예루살렘 교회에 임한 대 부흥의 둘째 요소는 모이는 열심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대 부흥기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모이는 열심”입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인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공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믿는 자들이, 서로 왕래하고, 교제하고, 그 안에서 부분적으로 집회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과 만날 약속을 했고, 어떤 경우에도 이 약속을 어기지 않으며, 한마음이 되어 모였습니다.

이 모임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모이는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여건상 믿는 자들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집회가 가능했을까요?

불과 며칠 전에 사도들이 잡혀서 위협을 당하고 “다시는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단단히 받고, 겨우 석방되어 나온 형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는, 오히려 핍박이 그들의 목전에 임했음을 확신하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담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볼 수 없는 비밀 장소가 아니라, 공공장소인 솔로몬 행각에서, 그것도 대낮에, 거의 날마다 모였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웬만한 믿음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13절을 읽겠습니다.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여러분, 왜 상종이 없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 모임에 가담하면 “언젠가는 화를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서운 핍박과 여러 가지 생명의 위협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감히 상종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접근도 못하는 이런 상황에서, 공공연히 솔로몬 행각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 성도들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내어놓고,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부흥이 무엇입니까?

부흥은 “모이는 열심”입니다.

 

3.예루살렘교회 대 부흥의 세 번째 요소는 증거하는 열심입니다.

 

무엇을 증거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바로 복음입니다.

 

28절을 읽겠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두 번째로 재판을 받을 때의 상황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교회가 복음 증거에 얼마나 열심을 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재판장과 주고받은 말 가운데 보면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 이름으로 전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는데 “왜 예루살렘을 온통 예수 이름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놓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부지런히, 얼마나 담대하게, 얼마나 뜨겁게,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이름을 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복음증거하기에 힘쓰자, 양적부흥의 역사가 예루살렘교회에 계속되었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가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첫째는, 증거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변화가, 그들에게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전해도, 먼저 자신에게 매력적인 변화가 없으면, 전도가 잘 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가족에게 예수 믿자고, 수년간 권해도 자신에게 나타나는 어떤 변화로, 가족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전도의 열매를 맺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은, 그 수가 비록 오늘날과 같이 많지는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된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그들과 가까이하지 못하고, 거리를 두고 있던 사람들까지 “그들을 칭송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세계를 향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전파해야 합니다.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저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이런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 교회 성도들, 절대로 적은 수가 아닙니다. 만약 주님, 우리가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고, 그래서 인격과 삶이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되어, 세상 사람에게 매력과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익산시와 온 세계를 전부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4.예루살렘 교회 대 부흥의 마지막 요소는 하나님의 보호와 간섭하심입니다.

 

17-21절을 읽겠습니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그들이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사도들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밤에 옥문을 활짝 열고, 그들을 강제로 끌어낸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부 전하라”고, 명령합니다.

 

천사의 명령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사도들은 새벽부터 성전에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세상권력이 그들을 붙잡고, 핍박하려 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성취되어 갑니다.

그들을 풀어주고, 그들을 보호해 주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대 부흥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다시 잡혀 들어가 더욱 위험한 지경에 빠지지만, 그때도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권위자를 통해 위기를 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이었습니다.

 

교회사를 가만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려고 작정하셔서, 그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시며, 썩은 부분을 수술하고 치료하실 때는, 위대한 종들을 일으켜서, 특별히 역사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어떤 특별한 계획을 위함이 아닌가?”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만약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 지역사회, 이 나라, 그리고 세계열방에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용하시는 동안 교회뿐만 아니라, 성도들 각 사람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위험이나, 사탄의 교묘한 역사 앞에서도, 반드시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