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다 (사도행전 5:1-11)
성령충만한 교회, 성령충만한 성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은 죄는 성령을 속이고, 성령의 역사를 거역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자주 반복되는 용어에는, 우리가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이 일을 돕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했고, 11절에 보면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죽자,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다 두려워했습니다.
아내 삽비라 마저, 사도의 발 앞에서 쓰러지자,온 교회가 두려워 떨었습니다.
아마 교회와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굉장한 공포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자신들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비슷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였을까요?
그들이 가진 두려움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에 임재하여 계시는, 성령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굉장한 위엄과 권위를 가진 존재가 교회 안에 계신다.”는, 것을 똑똑히 체험했습니다.
둘째는, 사도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도들의 권위는,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초라한 경력을 가진 사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 들어 사용하셨기 때문에,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사도 베드로의 발 앞에서, 순식간에 죽음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지은 죄, 숨은 죄까지도 다 아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아마 자신들도 비슷한 죄를 범한 것이 없나, 살피며, 겁을 내기도 하고, 그 죄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갖게 된 두려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온 교회를 향해 주신 두려움이었습니다.
때문에 성령에 대한 두려움, 사도들에 대한 두려움, 죄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1.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교회에 이처럼 끔직한 사건을 허락하셔서 온 교회가 큰 공포로 짓눌리게 하셨을까요?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아장아장 걷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왜 심적으로 부담을 주시면서 까지, 두려워하게 만드셨을까요?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들의 어린아이시절을 생각해 봅시다.
어린아이가 처음 나쁜 짓을 했을 때, 부모가 보이는 반응은, 자녀의 다음 행동에 큰 영향을 줍니다.
부모가 어떤 태도로 그 문제를 다루며 “얼마나 엄하게 두려움을 심어주느냐?”에 따라, 나쁜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장성한 다음에는,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심하게 다루면, 당장 반발하고 나설 것이고, 나중에는 부모의 가슴에 못질을 할 정도로, 고통을 안겨 줄 수가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때가 늦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때는 부모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어린 교회를 엄하게 다스리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 믿고 사탄의 시험이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된 어린 교회, 예수 믿고 용서 받았으나 괜찮다며, 낭만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약점을 가진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단호하게, 교회가 평생 잊을 수 없도록, 하나의 사건을 모델 삼아,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재하고 계신 교회에 죄가 들어오도록 함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엄격하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구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종노릇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400여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해방이라는 것을 맛보고는, 아무런 구속 없이 새로운 체제를 가지고,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광야교회를 열어주셨습니다.
이 어린 광야교회에서도, 아나니아 부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레위기 10장에 나오는, 나답과 아비후의 일입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가지고 들어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모든 절차를 지키며, 정성스럽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불이 나와, 그들을 삼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답과 아비후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향로에 담은, 불 때문입니다.
향로는 하나님 앞에 제사드릴 때,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을 담은 기구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엉뚱한 데서, 불을 가져와 그 향로에 담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지만, 당사자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뭐, 불은 다 같지 않나. 어디에 있는 불을 담아가든 하나님 앞에 들이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인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태연하게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른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단지 불을 가지고 들어갔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그 자리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때도 어린교회를, 굉장히 무섭게 다스리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이해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린교회와, 어린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강한 의지였습니다.
예배와 예배를 드리는 자세에 조금이라도 인위적인 것,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인간적인 것이 내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 교회가 기억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이후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신약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지만 “헌금을 약간 속였다.”고 해서, 성령께서 생명을 거두어 가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없을 리가 만무합니다.
분명히 헌금할 때, 더러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처음에 결심한 것과는 다르게 헌금을 조작해서, 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 그 한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록된 이 사건을 읽을 때마다 “온 교회가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는, 교훈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속이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 사건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아무리 흔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2. 우리가 가져야할 유익한 두려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두려움을, 계속해서 갖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있음으로 인해, 죄 짓는 것을 예방할 수 있고, 하나님께 더 겸손히 순종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1) 성령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을 가지고 모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로 그분을 의식하며 일하고 있습니까?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찬송과,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쉬지 않고 살피시는 그분을, 어느 정도 의식하고 두려워하면서 모이고 흩어집니까?
2) 교회지도자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성도들에게 교회지도자를, 너무 두려운 존재로 인식시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는, 신약시대 사도들에게 있었던, 그런 권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면에서는 사도들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를 먹이고, 지도하고, 인도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성도들을 가르쳤듯이, 오늘날 목회자들은, 성도를 가르칩니다.
사도들이 교회를 책임졌듯이, 오늘날 목회자들은 교회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목회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지 않다거나,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않는 이상은,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세우신 지도자를 통해, 먼저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감을, 어느 정도 교회지도자들에게 갖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놀라울 정도로 목회자의 말을, 가볍게 생각하거나, 우습게 생각합니다.
“흥, 내가 이 교회 아니면 예수 못 믿나?”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3) 범죄에 대해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책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책벌은 당회가 “어떤 신자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징계해야한다.”고, 판단될 때, 사랑과 두려움으로, 그 형제와 자매의 영혼과 교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40여 년 전만해도, 징계를 받은 사람은, 다른 교회에 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교적을 옮겨 주지 않으면, 다른 교회에서는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징계를 받게 된 사람은, 교회의 징계를 주님께서 벌하시는 것으로 알고, 겸손히 받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성도는 행여나 말씀을 어기며 함부로 살다가 교회로부터 책벌을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3. 우리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에게 느끼는 고마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 사건을 통해 “우리에 무엇을 교훈하고 계시는가?”를, 꼭 기억합시다.
그것은 “성령을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시다.
목회자도, 성령 앞에서 부들부들 떨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들부들 떨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얼마나 마음속으로 떨며 두려워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목숨 걸고 복음을 전파한 사도 바울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성경을 많이 묵상한다고 할지라도 “절대 성령을 속이지 않았다.”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능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성령이 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교회는 잘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 하지 않고, 성령을 거역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얼마나 모든 면에서 탁월한 교회가 많은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타락한 이 세상에서는, 탁월하고, 똑똑하고, 인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교회는 커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성령께서 거하시는 교회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성령께서 거하시고, 함께 하시는 교회입니까?
잘못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깨우쳐 주셔서, 회개하는 교회입니다.
목사가 잘못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목사가 깨닫고 회개하도록 하는 교회, 당회가 무엇인가 잘못 판단하고 죄를 범하려 할 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깨닫게 하고, 두려워 떨게 하는, 그런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나쁜 짓을 많이 해도, 오히려 겉으로 볼 때, 복이 넘치는 듯 보이는 신자들이 다니는 교회가 있다면, 그곳에 성령이 거하신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다니던 예루살렘 교회에 거하신 성령은, 오늘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거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를 주님의 말씀으로 알고 두려움으로 받아야 합니다.
또한 범죄에 대해서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늘 우리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델로 만드신 것입니다.
만약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천국에 있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서, 그들을 만날 때 뭐라고 말할까요?
“고맙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덕을 봤는지 모릅니다. 당신들이 그때 그렇게 희생되지 않았다면 아마 나도 그런 죄를 마음대로 범하다가 심판받았을지 모르는데 덕분에 내가 살았소.”하며, 분명히 악수하고 인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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