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과 변화 (사도행전 9:3~5)
사울이 예수 믿고 돌아온 사건은,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회심 사건입니다.
이에 비견될 만한, 다른 어떤 회심 이야기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사울의 회심 사건은, 성경에 반복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예수를 향한 적개심에 가슴이 얼마나 끓어올랐던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던 중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도피하여 다메섹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그 빛 앞에 한마디 말도 못하고, 그냥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회심”이란 “가다가 돌아 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에서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따라서 “회심”은 “회개”와도 다릅니다.
“회심”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쓰는 말은 아니지만, 보통 “회개”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이 단어를 쓰고, 또 어떤 복음주의 단체는 “중생”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울에게는 “중생”과 “회개”의 역사가, 한순간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급격한 체험을 일컬어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회심”은, 마음의 변화인 동시에, 외적으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생활의 변화와, 인격의 변화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1. 진짜인가? 가짜인가?
벌코프의 “조직신학”에 따르면, 몇 가지 회심의, 예가 있습니다.
1)먼저, 국가적인 회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습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왕이 나왔을 때, 전 국민이 우상을 내던지고, 일제히 하나님 앞에 돌아온 역사가 바로 그 예입니다.
그러나 국가적인 회심은, 간혹 그중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로 피상적인 돌이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거짓된 회심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고, 아들 므낫세라는 악한 왕이 통치를 시작했을 때, 온 나라가 한순간에 하나님을 내버리고, 또 다시 우상을 숭배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신약시대에는 일시적인 회심이 있었습니다.
딤전19-20절을 읽겠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같은 사람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까지 깨어져, 결국에는 교회를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회심한 사람들이 보이는 결과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 말씀처럼, 한번 성령의 은혜와 복음의 은혜를 맛본 사람이 타락해서, 이단의 우두머리가 되기도 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되기도 하는,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사람 역시, 일시적인 회심을 한 사람들입니다.
히6:4-6절을 읽겠습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가룟 유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악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예수님께 감동을 받은 것이 사실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나름의 확신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마귀의 역사로 끝나 버렸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회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룟 유다처럼, 일시적인 회심을 한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교회 안에는, 가라지가 반드시 함께 자랍니다.
따라서 일시적으로 회심한 사람이 교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핍박이 닥치거나, 또 교회가 어떤 큰 십자가를 져야할 상황이 벌어지면, 그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이런 회심은, 본인에게도 비극이요, 교회적으로도 비극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일시적인 회심자가 교회 안에 많다면, 그 교회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목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럴듯하게 목회하는 것같이 보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실성이 결여되면, 목사라도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빌2:12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어떤 사람이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의 자녀로 남을 수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 하나님과의 사이에, 진실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2.눈에 띄는 변화가 있는가?
회심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으로 갖는 모든 조건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중생과 회심” 중 어느 것이 먼저일까요?
태나기 전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로 거듭나야, 그다음에 그 씨가 싹이 트고 자라납니다.
그리고 줄기가 뻗어 올라갑니다.
요일3: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으면, 절대로 죄가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을 닮아가지 못하게, 우리를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중생이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닮게 하는 씨앗이 우리 안에 심기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을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자신도 모르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이 “그래, 나 믿어 볼게”라고 말하면, 벌써 그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씨가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거듭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관이 변하고, 취미도 변하고, 삶의 습관도 변합니다.
이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한순간에 일어나, 사람이 싹 달라지기도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급진적인 회심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소걸음처럼 느릿느릿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변하는 사람에게 “언제 회심했느냐?”고 물으면, 대게 “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하고, 대답합니다.
좀 느려서 그렇지 변하기는 변합니다.
이것도 회심입니다.
완만한 회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급격하든지, 완만하든지, 회심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인식할 정도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회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개는 끄덕이는데, 가치관도 변하지 않고, 생활습관도 변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눈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회심이 안 된 사람입니다.
3.급진적인 변화에 따른 진통입니다.
회심은, 중생에 뿌리를 둡니다.
중생이 없는 사람은, 회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듭나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드디어 거기서 자라는, 새 생명이 사람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영역인 반면, 회심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동시에 인간이 반응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여, 자신을 그 뜻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이 경험한 회심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채 기도했습니다.
그 시간 사울에게는, 상당한 진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진짜 예수를 만난 것인가?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 내가 예수께 완전히 승복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구약에서 배우고 믿어 온 대로 메시아를 계속 기다릴 것인가?”를, 사울은 계속 진통했을 것입니다.
그 진통 끝에, 사울은 드디어 동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마침 찾아온, 아나니아의 기도와 함께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눈에 덮였던 모든 비늘이 벗겨지면서, 시력을 회복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울이 끝까지, 하나님께 동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변화를 주시려고 해도, 회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은 지 아주 오래 되었는데도, 근본적인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성령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무언가 남겨 둔 것이 있어서, 버티고, 재고, 비판하며, 시간만 보냅니다.
남이 볼 때, 교회에 드나드는 것 외에는, 예수 믿는 흔적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그런 생활을 10년, 20년 합니다.
그러므로 진짜 회심하려면, 하나님께 동의해야합니다.
회심은, 의식적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단 한 번 변화된 후에, 성화로 들어가는 일 같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반복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변화된 후에도 탕자처럼, 슬그머니 세상 속으로 미끄러져갑니다.
그러고는 매 맞고 다시 돌아와서, 또 변화를 경험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회심은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회심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사울처럼 급진적인 회심을 맛보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큰 역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기 위해, 처음부터 강하게 성령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일을 독특하게 합니다.
사울을 봅시다.
16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한 회심 이후, 사울은 몽둥이를 얼마나 많이 맞았습니까?
또한 돌멩이를, 몇 번이나 맞았습니까?
사울은 세상에서, 그 좋은 결혼 한 번 못해보고, 일생을 떠돌이처럼 살면서, 굶주리고, 헐벗고, 태장으로 맞는 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4.그런가 하면 말씀을 통한 회심도 있습니다.
이런 회심을 경험하는 분들을 보면, 오랫동안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교회와 관계를 맺어 왔지만, 무언가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것이 없어, 그저 형식적인 모습만 보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나, 일상생활이나, 별 차이가 없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어느 순간, 혹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마음을, 꽉 잡아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분명히 달라진 모습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중생은, 반드시 회심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간혹 목회자 가정이나, 믿음의 가정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을 보면, 예수 믿는 생활이 그저 밥 먹는 일처럼 평범한 일이라서, 어떤 자극도 없고, 스스로 깨닫는 일도 드뭅니다.
그냥 이런 것이 믿음생활인가보다 하고, 미지근하게 살아갑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런 성도들이 회심할 수 있도록,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말씀으로, 바로 잡아 주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회심하지 못하고, 회의론자가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방관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도, 사울처럼 “자신이 완전히 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면, 하루아침에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회심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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