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다 (사도행전 9:3~5)

Johnangel 2022. 9. 29. 13:54

전적인 은혜를 부어주시다 (사도행전 9:3~5)

 

사도행전 9장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살기등등하여 기독교를 핍박하던 사울이 한순간에 꺾이는 장면을, 이 본문에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면, 아무리 거세게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라도, 마치 지푸라기가 꺾이듯이 아무 힘없게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 여기서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믿고 돌아온 사건을 특징짓는다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주님을 거역하기만 했지, 자기가 구원받겠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찾아 헤매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애쓴 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사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서신서 여러 곳에서, 자신이 예수 믿게 된 것을 간증할 때, 오직 “은혜”라는, 말만 사용했습니다.

3: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려고”라고 했고, 1:15-16절에 보면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라고 했고, 고전15:10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은혜를 거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도 “은혜로 나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아무 수고도, 공로도 없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자신을 불러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사울은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나타나 살아계심을 보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지, 사울 자신이 노력한 대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신학을 일컬어 “은혜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은혜신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 역시 은혜를 강조하며 ,교회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1. 사울의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사건입니다.

 

사울의 회심은, 초자연적인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울을 예수 믿게 끌어들이셨고, 이것은 사울에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 좋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적허영으로, 똘똘 뭉친 아주 도도하고,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지적수준이 굉장히 높은 수사학자였지만, 영적으로는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젊은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그야말로 내적인 고뇌가 절정에 올랐을 때, 마치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사울을 부르신 것처럼, 어거스틴을 부르셨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의 사전작업이 있었는데, 그는 밀나노의 주교인 암부르시우스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가, 그의 마음에 되살아났습니다.

 

또한 키케로와 플라톤의 철학을 깊이 연구한 바 있고, 이사야서와 로마서를 탐독하면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주님 앞으로 완전히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몸부림치면서, 자기 죄와 연약함 때문에, 고뇌할 때, 드디어 “펴서 읽으라. 펴서 읽으라.”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그가 펴서 읽은 것이 이 말씀입니다.

13:11-14절을 읽겠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니 육신의 정욕을 다 벗고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자.”는 말씀을 듣고,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한순간의 사건이요,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이요, 오직 하나님만이 일하신 사건이요, 사람의 손길 하나 빌리지 아니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강조한 것처럼, 어거스틴도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것을, 얼마나 강조했는지 모릅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독일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하던 학생시절, 여행을 하던 도중에 천둥을 동반한 폭풍우를 만나, 곁에서 함께 걷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일을 당했습니다.

너무나 소름이 끼쳐, 자신도 모르게 “성 안나여, 성 안나여 도우소서. 그리하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하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천주교 풍토였기 때문에 급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부르지 않고, 성자를 불렀습니다.

그는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으로, 법학을 중단하고, 어거스틴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08년 드디어, 1:17절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마암아 살리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짓누르던 그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죄 용서받고, 예수의 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1517년 종교개혁을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 구원은 값없이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사울, 어거스틴, 루터, 이 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감사하고, 감격한 것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은혜신학”을, 이어받은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개혁신학은, 그렇습니다.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내가 노력했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셨다고, 착각하지 맙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경과 거리가 먼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있으면, 얼마나 있으며, 잘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며, 자랑할 것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한낱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직 은혜로 사울도 구원을 받았고, 오직 은혜로 어거스틴도 구원을 받았고, 오직 은혜로 루터도 구원을 받았고, 오직 은혜로 우리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값없이 받은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3.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사울은 회심 후,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습니다.

우왕좌왕하지 않았습니다.

머뭇머뭇한 일도 없습니다.

한번 변화받자, 그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분명했는지,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고, 다시는 후회하지 않았고, 다시는 회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생애를 봐도 그렇고, 루터의 생애를 봐도 그렇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위대한 선배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두 번 다시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보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며, 한참 기뻐하고, 좋아하다가, 나중에 회의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합니다.

3:1절을 읽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주님을 바라보고도, 그렇게 주저앉고, 의심하고, 뒤로 빠지고, 세상으로 갔다 왔다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회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다시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앞으로가 문제인 것입니다.

 

4. 절대주권자의 선택입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작용했습니다.

여러분. 임금들 앞에서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명예로운 직책을, 하나님께서는 왜 아나니아가 아닌 사울에게 맡기셨을까요?

 

어느 모로 봐도 사울은, 아나니아와 비교도 안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미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였습니다.

그에 반해 사울은 살기등등한 핍박자였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아나니아가 그 명예를 얻어야 마땅해 보이지만, 주님은 아나니아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이방의 사도로 사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절대주권”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부활의 예수를 목격했습니다.

 

사울의 회심은 “예수 부활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교회사학자 필립 사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과 함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건이 예수부활의 절대적인 증거가 된다.”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육체의 눈으로 보았는지, 영의 눈으로 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그가 “육체의 눈으로 보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영광을 보고, 견뎌 낼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이 육신의 눈으로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는,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가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으셨기 때문에, 인간의 시력으로 예수님을 직접 본다는 것은, 태양 열 개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주님을 보았다.”고 할 때는, 눈으로 본 것,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회심한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 중의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심하게 된 것 역시 “예수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