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유대와 이방의 벽을 허무시다 (사도행전 11:18)

Johnangel 2022. 12. 21. 22:33

유대와 이방의 벽을 허무시다 (사도행전 11:18)

 

사도행전 11장은,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베드로가 그간의 일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헬라파 신자들은, 베드로의 행적에 몹시 못마땅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베드로가 왜 고넬료 가정을 방문하게 되었으며, 거기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난 뒤에야 그들이 납득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그런 결과를 얻기까지 사도 베드로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1절에 나오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사도행전의 큰 고비를 넘기는데, 핵심이 되는 말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은, 자신들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가정의 구원 소식은, 큰 충격인 동시에, 약간의 거부감과 서운한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복잡한 심정이 깔려 있는 구절이 바로 1절입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이제 복음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이, 불협화음을 내는 것을 봅니다.

유대와 이방 사이에 있는 높고, 견고한 벽 때문이었습니다.

11장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벽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할례파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할례자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할례자들”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을까요?

또한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고 돌아온 수많은 유대인들이, 모두 할례를 받은 자들이었는데, 왜 교회 안에 할례파라는 무리가 따로 생긴 것일까요?

 

6:7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기 나오는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는, 바로 바리새인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유대교에서도, 아주 골수분자들이었습니다.

무서울 만큼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할례파”란,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할례의 중요성을 집요하게 강조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할례파 사람들은, 복음의 능력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교회에 들어와서 그들만의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교나 불교 전통에 깊이 잠겨있던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그것을 완전히 버리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샤머니즘이나 동양철학의 사고방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문득 나타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꺼번에, 몇 십 명, 몇 백 명씩 교회에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들끼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은 감사할 일이었지만, 이들이 예루살렘교회뿐만 아니라, 훗날 바울이 세운 이방교회에까지,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하나님의 불씨가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 성령의 은혜 안에서, 자아가 깨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잘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악의 뿌리는, 독한 데가 있는 것입니다.

 

2. 헬라파 사람들의 마음에 숨은 동기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할례파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율법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미련 때문에, 복음이 그들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트집을 잡는 것으로 드러나곤 했습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고넬료 가정에 다녀온 베드로에게, 할례파가 트집을 잡은 것은, 정작 할례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지 못한 자들과 함께 먹은 일을 문제 삼았습니다.

차라리 고넬료가 할례 받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면, 그래도 좀 나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의 집에, 유대인이 들어가서 함께 먹는 것이 죄일까요?

창세기부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다 뒤져 보아도,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례파는 왜 이런 트집을 잡았을까요?

 

성경에도 없는 법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유대인의 조상 바리새파 선조들입니다.

“유전”이라 부르는, 이 법은 유대의 율법학자들이, 구약성경의 율법에 기초하여,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해석해 만든 규칙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법이요, 규칙입니다.

 

여기 할례파 신자들은 “베드로가 인간의 유전을 지키지 않았다.”며, 신랄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할례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우월감에 빠져, 조금이라도 그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비판했습니다.

특히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은, 인간 이하로 취급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 믿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우월감이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할례파의 행위가 분파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트집을 잡은 것은, 성경이 아니라, 유전에 저촉되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사소한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하나가 되면, 나중에는 좀 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교리적인 문제를 들고 나와 교회에서 분파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할레파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15:5절을 읽겠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여기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은, 할례파를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구원받지 못한다. 이방인들도 할례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면 반드시 할례를 줄 것이요, 반드시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소한 트집거리가 쌓이고 쌓여, 교리논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에서 시작해서, 교리로 비화시키며, 대립하게 된 할례파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실 숨은 동기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일어나는 분쟁에는, 숨은 알맹이와, 겉으로 나타난 껍데기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할례파 분쟁의 알맹이는, 그들의 우월감과 교만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은근히 멸시하고 싫어하는 태도, 할례 받지 못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비판하는 자세, 이런 것들이 그들의 감춰진 속내였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을 좀 더 합리화하고, 논리적으로 주장하기 위해, 겉으로 내놓은 것이 교리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분열을 겪어 왔습니다.

왜 이렇게 계속 핵분열하듯 분파와 분쟁이 일어납니까?

그리고 알맹이는 뭐고, 껍데기는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교리의 차이를 말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다른 것이 있습니다.

교권을 잡으려는 인간의 욕심, 지방색, 증오, 질투, 이해관계, 등, 말하기도 민망한 치졸한 동기들이 가슴속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단도, 지역교회도, 분쟁이 있는 곳은, 다 똑같습니다.

저는 싸움을 많이 하는 교회, 싸움을 많이 하는 교단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런 교회와 교단은, 금이 간 항아리와 같습니다.

물이 금방 그릇에 차는 것 같지만, 하룻밤만 지나면 싹 빠져버립니다.

 

다툼이 있는 교회에 가보면, 설교시간에 울기도 잘 울고, 어떤 때는 굉장히 은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면, 그 울음도 다 헛것이요, 그 회개도 다 헛것이요, 물이 다 빠지고, 남은 빈 항아리처럼, 텅 비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내 편, 네 편 만들고 다닙니까?

지연, 학연으로 모여, 은근히 단체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옳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교회지도자를 비판하고, 다른 교인들의 동조를 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에 쌓인 모든 찌꺼기, 자칫 숨은 동기가 될 수 있는 찌꺼기, 다른 사람을 해치고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찌꺼기를 완전히 씻어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개인의 습관이나 집단의 전통이라면,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케 만드는 찌꺼기들이 굳어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고 주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아름다운 사도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의 법을 내세워 사도를 비난하는 할례파가, 베드로 앞에 의기양양하게 서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첫째는, 베드로는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의 연약함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나무라지 않았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과, 교역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세입니다.

자기가 잘못하는 줄도 모르는 사람을 나무라면, 역효과가 납니다.

이런 사람은, 온전히 성령이 주시는 지혜를 의지하며,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베드로는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변론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례 받지 못한 집에 들어가면 어때? 성경에 그런 말이 있나?”하고, 따지고 들려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변론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토론이나 변론을 하는 것은 무익합니다.

 

셋째는, 베드로는 자기 권위를 가지고 누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권위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대단했습니다.

오늘로 말하면, 교회 전체의 교황에 해당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권위로 “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너희가 무슨 잔소리냐?”라고 말했어도, 아무도 뭐라고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절대 자신의 권위로 누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권위로 누르는 대신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그대로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변론도 아니요, 권위적인 위압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자세는,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설명을 아끼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좀 낮은 사람, 대수롭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떻습니까?

되도록 설명을 생략해 버리고, 그냥 적당히 한마디로 끝내 버리고 싶어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엄청난 권위를 가진 베드로가 할례파 몇 사람한테, 해명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베드로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줍니다.

납득이 되도록, 오해가 풀리도록,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까지 가도록, 인내심을 갖고 이끌어 주었습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과 불편한 감정이 생겼다든지, 오해가 생겼다든지 할 때, 변론은 절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특히 과거에 어떠했든지 들추지 말고, 그저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고,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아름다운 자세입니다.

 

4. 최고의 권위, 최후의 결정입니다.

 

이런 베드로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했다.”는, 점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안 된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베드로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또한 12절에 보면, 베드로는 이 모든 것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고넬료 집에서, 증인 여섯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했던 것입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일곱 명의 증인만 있으면, 완전무결하게 진실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넬료 집에서 데려온 여섯 명의 증인과 베드로 자신이 증인이 되어, 이 일을 증거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했다”는, 베드로의 말은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소란하고 복잡해도, 이것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사실만 분명해지면, 반대하던 사람들도 그 뜻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 성령을 마시고, 한 몸을 이룬 교회의 진면목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았고, 하늘의 소리를 들었고, 또한 “가라.”하시는, 성령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또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직접 성령을 부어 주시는 역사를 똑똑히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을 만큼 그 뜻을 분명하게 붙잡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저 한마디만 해주시면, 깨끗하게 모두 순종할텐데, 성령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입니다.

내 생각만 성령의 생각이라고,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100%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방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끌고 가시는지, 지켜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당신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사셨기 때문에, 결코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고자 하시는, 목적과 방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교회는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