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경건한 자 고넬료, 구원받다 (사도행전 10:34~35)

Johnangel 2022. 12. 15. 10:41

경건한 자 고넬료, 구원받다 (사도행전 10:34~35)

 

신약의 고넬료를 소개하는 부분은, 구약의 인물 욥을 소개하는 부분과 비교가 됩니다.

욥의 경우는, 그의 신앙인격과 삶을 먼저 말씀하신 뒤, 재산과 자녀, 직업과 과정을 소개한 반면, 고넬료의 경우는, 그의 직업을 먼저 소개합니다.

 

성경을 보다가 어떤 때는, 이런 것에서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은, 자유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족장의 위치에 있었고, 부유했으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런 여건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며, 가정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남의 수하에 있는, 그저 군대 내에서 중대장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서열이 분명하고, 상하구별이 엄격한 체제에서,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경건하게 살기엔, 무척이나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넬료를 보면서, 신앙과 직업의 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직업에 영향을 줍니까? 아니면 직업이 신앙생활에 영향을 줍니까?

어느 쪽이 정상일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남달리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별로 직업에 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자라면 “그러면 그렇지.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이지. 시간도 되고 물질도 있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직업이 군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시간적으로 쫓기고, 조직에 매인생활을 하는 사람이 교회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아, 정말 믿음이 좋구나!”하는, 감명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직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합니다.

그중에서도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분들이, 어떻게든 바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바로 직업이 신앙을 좌우한다.”는, 생각이 잠재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직업 때문에 내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바로 못하겠다. 직업이 이러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나의 이런 사정을 잘 아시겠지”하며, 조금만 열심을 내면, 할 수 있는 것도 아예 덮어놓고, 안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업이라는 발에, 신앙생활이라는 구두를 신기려고 애쓰지 마시고,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발에, 직업이라는 구두를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내 신앙에 걸맞게 판단하고, 분별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 아주 큰 술집을 경영하며, 예수를 믿게 된 분이 있습니다.

다행히 교회에 잘 적응하고, 예배도 열심히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조금씩 자랄수록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아마도 “많이 벌어서 십일조만 잘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성령께서 강하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결국 신앙이라는 발에, 자기직업을 맞춰 신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의 군인이라는 것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로마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일이 죄입니까?

아닙니다.

간수가 회개했을 때, 바울은 그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삭개오의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다.”고, 크게 축복하신 다음에, 그에게 직업을 바꾸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성의 세무서장이었습니다.

당시 세관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했는데, 대개 세리들은 “면허증을 가진 강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세리라 하더라도 부정직한 모습을 버리고 양심적으로 일한다면, 그 직업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직업 탓이 아닙니다.

 

고넬료가 이 교훈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부장이라고 하면,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 지휘관으로, 포악하고 인정사정이 없는, 전통적인 로마군대를 이끄는 장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일컬어집니다.

 

우리는 “경건”이라는 말을 좀 막연하게 사용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인 “큐티”를, 흔히 “경건의 시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일까요?

여러 참고서적을 조사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깨어서 주의하는 마음가짐 또는 그러한 생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마음 자세가 바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나서부터, 그는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비록 로마 군인이고, 남의 수하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경건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경건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함으로, 이웃을 향해서는 구제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칼빈은 이런 고넬료를 보고 “최선을 다해 십계명을 지킨 사람”이라고, 칭송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한 고넬료의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지키려 한 삶이고, 백성을 구제한 모습은 이웃을 향한 제5계명부터 제10계명을 지키려 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경외란 헬라어로 “율라베이스”라는 단어로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두 단어가 복합된 말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바로 어린자녀가 부모를 대할 때의 마음입니다.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어린아이가 자기를 보살피고 보호해 주는 부모에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두려움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12:30절을 읽겠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경외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에는 낭만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많이 섞여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나 똑똑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참 단순한 어린아이와 같았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애정을 쏟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그대로 모시면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끌어내려서 인간인 우리와 비슷한 수준에 놓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두려운 줄 모르니까, 사랑의 하나님만 믿고 제 마음대로 죄를 짓습니다.

 

새신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낭만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인지,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있는 경외함을 뜻하는 것인지,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다 받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알 만큼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은 사람이 계속해서 “낭만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여러분,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흔드는 어린아이가 할아버지 말을 잘 듣습니까?

이런 아이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큰소리쳐도 할아버지 말에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면 순종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쳐도 경외함에서 나오는 사랑이 아니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인 실천도 없이, 막역한 동정으로 끝나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넬료처럼 자기 주머니를 털어 이웃을 구제하는 사랑의 표현이, 우리에게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일3:16-17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데,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을 닫아버린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한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요일3:18-19절을 읽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을 행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아마 고넬료는, 핍박도 꽤 받았을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군대 안에서 혼자 시간 맞춰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쓰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장교들끼리 이해가 되었겠습니까?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을 수도 있고 “너는 왜 로마인이면서 유대인의 종교를 믿느냐? 왜 로마의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이라는 신만 따른다고 하느냐?”는, 비난과 함께 진급하는 데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고넬료의 군대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나의 추측입니다만, 그가 가족과 함께 성령충만을 받고,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자인 것을 확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출신지인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회의 중요한 일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딤후3:12절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핍박이 오고, 따돌림과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고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사람 중심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것이요,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랑을 행하면서 살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핍박을 받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경건생활이, 그저 주일낮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세의 교회는 경건의 위기를 당한다.”고, 성경은 분명히 예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말세에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은 고넬료 같은 사람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고넬료처럼 날마다 기도에 힘쓰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던 사람들이 예수 믿고 돌아오게 될 것이고, 생각지도 않던 가정이 치료를 받게 될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건하게 살아라. 내가 너를 통해 일하고 싶으니 경건의 능력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말씀대로 한번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같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