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 (예레미야애가 3:19-24)
완전하지 못한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 땅의 한 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할 때 나타나는 반응은, 우리가 모두가 깊이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신앙에 따라서 문제에 대한 반응과 과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가 당한 어려움으로 인하여 믿음이 무섭도록 동요되는 과정에서,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거기에서 다시 한번 전환점을 찾아 그의 믿음이 상승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예레미야가 문제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며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상과 현실은 다른 것입니다.
여기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당시 유다나라의 멸망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들었고, 또한 그가 들은 메시지를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따라서 선지자 에레미야는 “그런 비극 앞에서 나는 결코 비겁하지 않고 선지자답게 살리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참한 그 비극이 자기 눈앞에 닥쳐오자, 그의 믿음이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의 입에서는 불평이 홍수처럼 터져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3:1-17절까지를 읽어 보면, 놀랍게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불평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의 때에 반드시 찾아오는 손님은 “기억”이라는 마귀의 신하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과거에 용서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던 죄라든지, 나를 괴롭혔던 사람의 이름이라든지, 혹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뇌리에서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정신적인 고문입니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믿음이 강한 선지자도 어려운 역경 속에서 이렇게 믿음의 동요를 느꼈다면,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고난 속에서 절망의 깊은 늪으로 얼마든지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시련 앞에서 고통하고 있는 자들의 연약함을 우리는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신의 직분이나 경력을 믿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믿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무릎을 꿇어야할 것입니다.
2.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두 번째 단계의 변화입니다.
예레미야가 절망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을 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번민스러운 생각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마음속에 비취는 빛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22절의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끝자리에는 소망으로 향하는 전환점인 문이 열려있습니다.
여기 예레미야 선지자가 갑자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절망의 늪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은, 그 절망의 자리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만나 믿음이 흔들리고, 불평하고, 절망에 빠져 시달리고 있는 동안에도 마28:20절에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당하는 그 어떤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함께 계신다”고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면서도 우리가 완전히 탈진하여, 바울사도의 말씀처럼 “살 소망이 끊어져 버린 것”같은 궁지에 몰릴 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으로 인하여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되면, 주님은 신비스러운 회상을 일으켜 우리를 다루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갑자기 떠오르게 하는 성경말씀이라든지, 어떤 설교를 듣는 순간 깨닫게 하신다든지, 아니면 조용히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기도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이 가능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의 회상인 것입니다.
3. 세 번째 단계로 믿음의 자리로 옮겨가는 예레미야의 모습입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그리고 32-33절을 보면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제까지 흔들리던 믿음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놀라운 수준까지 도달하였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다름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에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의 길에서 제외시켜 주신다고 보장하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절망의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에 갑자기 생각나게 하는 놀라운 말씀을 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소망으로 세 가지를 무장해야 합니다.
1) 여호와를 바라는 것입니다.
24절을 읽겠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기 “바란다”는 단어는 “기다린다” 혹은 “희망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오직 주님만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39: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님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소망은 오직 주님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32-3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이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리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겨자씨만한 적은 믿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하여 기적을 이루는 힘을 가지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3)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삶의 구체적인 결단과 변화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40-41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기를 위해서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제 이 시간 나의 실패와 방황에 종지부를 찍고, 여호와께로 돌아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로 돌아서면 주님께서 받으시고 책임을 지십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모두 고난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그 고난이 나의 인생에 큰 유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시119:67절을 읽겠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은 내게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고난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변장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난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총으로 알고, 주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 앞에 돌아가는 믿음의 역사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간 “땅끝까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신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을 기대하며 전심을 다해 기도하는 우리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요16: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네 기쁨이 충만하리라”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언제쯤 전도해야 합니까? (갈라디아 2:8-10) (0) | 2023.04.05 |
---|---|
버림받을 뻔한 여자 (마태복음 15:21-28) (0) | 2023.04.04 |
주님의 비전을 가진 자 (마태복음 4:18-22) (0) | 2023.04.02 |
우리는 만나면 힘이 됩니다 (마태복음 9:35-10:1) (0) | 2023.04.01 |
우리가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2:14-24) (0) | 2023.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