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우리가 언제쯤 전도해야 합니까? (갈라디아 2:8-10)

Johnangel 2023. 4. 5. 16:58

우리가 언제쯤 전도해야 합니까? (갈라디아 2:8-10)

 

문화를 초월하여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분들을 가르쳐 우리는 선교사라고 부르는데, 그 본래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선교사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는데 헬라어에서는 사도를 “아포스톨스”(apostolos)라고 부릅니다.

그 뜻이 바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분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을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7:18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셨고, 요17:20절에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제자들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전도 받을 후대의 모든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는 본래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상대로 당신이 진정한 주님의 사도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쓴 편지였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의 우선순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를 넓은 의미로 적용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을 살면서 할 일이 많지만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적 사역은 무엇일까요?

 

1. 불신자에게 가서 전도하는 선교사역입니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불신자의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오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구약을 보겠습니다.

사1: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고, 사55:1절을 보면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신약을 보겠습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고, 계22:17절에서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받은 자들의 소명과 관련하여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마28: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했고, 갈2:9절에서는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 사도는 전도의 대상은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저들의 동족인 유대인 전도에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 전도에 헌신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8절에서는 “베드로를 할례자인 유대인들의 전도자로 삼으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전도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은사)를 따라 된 일이기 때문에 유대인 전도자로 부르심 받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이방인 전도자로 부르심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피차에 서로 협력의 필요가 있다”는 것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전도사역을 하던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부르심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복음 전도자가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우리는 모두가 다 전도자요,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불신자들이 바로 우리의 전도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언제쯤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좀 영적으로 더 성장하고 훈련을 받은 후에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숙하고 훈련된 사람이 전도하면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미성숙과 훈련부족을 구실로 전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모든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만난 즉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을 배회하던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치유를 체험하자 즉시 예수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네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하시며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자마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요한4: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분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전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면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면 성경공부하게 됩니다.

전도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금년한해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전도사역에 헌신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전도의 헌신으로 금년을 마무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2.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구제사역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바울사도는 “전도 외에 한 가지 더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한 가지 사역이 그의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12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 모두의 공통적인 부담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사역입니까?.

구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행6:1절을 읽겠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구제사역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교회가 다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구제사역을 포기하자”고 결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루살렘교회는 구제사역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그들은 구제사역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사역과 함께 구제사역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와 구제는 우리 교회의 셀들이 가져야 할 사역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급속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고현교회 안에서 마을별 혹은 특성별로 교인들에게 안정적인 가족구조를 제공하여 교회정착과 영적성숙, 공동체적 봉사를 실현하도록 섬기며 더 나아가 재생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셀모임을 가질 때마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고, VIP 태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름철 농어촌 전도여행과 겨울철 단기선교에 동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의 전도와 구제의 실천은 우리 모두가 “빚진자”라는 성경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은 누군가가 과거에 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요3:16절은 잘 기억합니다.

그러나 요일3:16절의 교훈은 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요일3:16절은 요한3:16절이 증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평생에 붙들고 살아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요일3:16-17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주경 학자들은 전도의 명령을 위대한 사명이라고 불렀고, 구제를 통한 사랑의 실천을 위대한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에 포함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자들을 우리가 책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여리고 길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구제사역에 헌신하기를 꺼리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크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시작하듯이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작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제를 포함한 사랑의 실천사역 중에는 물질이 아닌 우리의 시간과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참여하는 병원전도 사역이나 길거리 전도사역 그리고 이번에 장신지구 입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사역과 어르신 섬김팀의 사역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이 시간 고민하고 전도와 구제를 실천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