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버림받을 뻔한 여자 (마태복음 15:21-28)

Johnangel 2023. 4. 4. 16:30

버림받을 뻔한 여자 (마태복음 15:21-28)

 

인간은 누구나 버림받음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어릴 적에는 부모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결혼 후에는 배우자가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직장 생활을 하면서는 이 직장이 어느 날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늙어서는 자식들이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그리고 심지어 좋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는 않으실까? 라는 불안한 생각이 우리의 의식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를 범한 첫 사람 아담이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고 말할 때 바로 그런 상태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생각은 죄의식과 연관되어 의식의 표면으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런 정도가 심해지면 자기가 버림받음을 상상하고 버림받지 않기 위한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성격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배우자가 좀 늦게 와도, 시간을 변경해도, 연락을 취하지 않아도 나를 배신한 것으로, 혹은 나를 거절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에 빠지고, 충동적이고 파괴적 행동을 시도하기도 하고, 더 심해지면 약물중독이나 자살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이런 증상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의 2배라는 통계가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와서는 문화 환경의 변화로 남성들에게도 이런 증상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남자나 여자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 버림받음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이런 버림받음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마침내 큰 은혜를 받은 여자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하마터면 버림받을 뻔 했지만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인정을 받고 큰 칭찬과 기적을 경험한 예수님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버림받지 않고 은혜받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1. 상황적인 냉대를 극복해야 합니다. 

 

막7:26절에는 이 여인에 대하여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로”는 시리아에서 나온 말이고,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여인은 두로와 시돈이라는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살던 지금의 레바논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이 귀신들인 어린 딸을 데리고 고침받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별로 이 여자의 요청에 관심이 없으신 듯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예수의 제자들은 노골적으로 이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그렇습니다.

모든 상황이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못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면 초가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종종 나갈 길은 없고, 앞이 보이지 않고, 모두가 자신을 반대하는 적들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을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주님 앞에 엎드려 두 마디 말을 되풀이 합니다.

22절에서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고, 25절에서는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께 부르짖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이 기도는 주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가르쳐 교회 역사에서는 “예수님의 기도”라고 불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 이후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여자의 기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당신도 이 기도를 배우시겠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리고 마침내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2. 자존감의 상처를 극복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존감의 상처를 받는 일은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것입니다.

두 가지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반응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바람직한 건강한 반응은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펴 자신의 유익과 성숙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여기 가나안 여자가 보여준 반응이 바로 그런 반응이었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때 이 여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가 개라고, 지금 내게 상처 주는 너야 말로 개가 아니냐”하고 예수님께 대들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27절을 보면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는 개 같은 인생을 살아왔고 나는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 여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에게 개들에게 내리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나이다” 여러분, 이 여자의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는 정신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는 제가 죄인인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옵소서”

우리 모두 자존감의 상처를 넘어서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의 무응답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버림받음을 가장 민감하게 경험하는 때가 있다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여인이 바로 그런 버림 받음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22절에서 부르짖는 이 여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그런데 이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3절에 보면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절박한데 하늘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버림받음의 심정을 극복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마다 이 침묵의 딜레마를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딜레마가 없으셨나요?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는 겁니다.

그때 어떻게 하셨나요? 포기하셨나요? 욥은 그런 자신의 절망의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욥23:8-9절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리고 욥13:24절에서는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원수로 여기시나이까”라고 보다 솔직한 질문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여자의 심정이 아니었겠습니까?

이 여자는 가까스로 자존심을 버리고 은혜를 구했을 때, 예수님은 무슨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까?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냉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침묵과 거절 저 건너편에서 마침내 기도를 응답하실 주님을 향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려 25절을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성경은 결코 우리의 단 한 번의 기도로 모든 것을 응답하시리라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가 꾸준히 하나의 기도의 제목을 붙들고 간구하는 중요성을 가르치십니다.

 

어쩌면 그분은 기도의 응답 그 자체보다 우리의 기도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판단하셨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 기도의 과정을 통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우리의 믿음의 형성 과정을 더 중시하신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7:7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단어의 정확한 번역은 “계속해서 구하십시오.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십시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의 응답이 없으셔도 버티셔야 합니다.

기도 응답의 징조가 없어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응답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여전히 기도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는 그의 명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의 첫 장에서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의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바깥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됩니다./하지만 별을 보기 원한다면/어두움이 필요합니다./비록 별은 어두움을/필요로 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지만”

이 시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인생을 사시면서 꼭 버림받으심을 체험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하지만 어두운 밤을 지난 새벽/주의 품에 안기는 은혜를 맛보아 알기 원하신다면/버림 받으심의 체험이 필요하십니다./비록 우리 스스로 그 버림받음의 상처를 요구한 것도/그 고통을 즐거워 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상황적인 냉대를 극복하고 일어서십시오.

자존감의 상처를 변명하지 말고 자신의 정직한 모습에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치유자이신 그분 앞에 다시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부르짖어 구해 보십시오.

그가 내 인생의 삶에 남기시는 부스러기가 새 인생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들아,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