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성공자가 됩시다 (요한계시록 4:1-4)
뉴욕에 있는 어느 대형교회에서 유명한 설교가 헨리 워드 비쳐(Henry Ward Beecher)목사님을 초청하여 주일예배 설교를 계획하고, 그 교회는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 직전에 갑작스런 질병으로 헨리 워드 비쳐 목사님이 강단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워드 비쳐 목사는 그 교회와 의논하여 자기를 대신하여 그의 동생인 토마스 비쳐(Thomas Beecher)목사를 주일예배 설교자로 급작스럽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주일 날 아침 헨리 워드 비쳐가 올 것을 기대한, 이 교회의 성도들은 초만원 사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설교 순서가 되어 담임목사가 사정을 설명하고, 토마스 비쳐 목사를 소개하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여러 교인들이 일어나서 나가는 모습을 보자 토마스 비쳐 목사는 이런 유명한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저의 형님이 갑작스런 병환으로 오늘 이 예배에 못 오게 됨을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특별한 광고를 드리고 말씀을 증거할까합니다. 지금 예배중간에 일어나시고 있는 분들 말고, 혹시 또 헨리 워드 비쳐 목사를 예배하기 위하여 오신 다른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 이 시간에 다 퇴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 헨리 워드 비쳐 목사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내는 조용해 졌고, 그날의 예배에는 특별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에서 찾고자 합니다.
본문 계4장과 5장은 하늘나라의 커텐을 잠간 열고, 하늘나라에서 진행되는 예배광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영광을 접할 수 있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몇 년 전 제가 대구 어느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할 때, 어느 평신도가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예배에 대한 불만을 고백하며 “목사님, 저는 예배할 때 하늘 문이 열려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한 말이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하늘나라 예배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계1:10절을 보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사도요한이 전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주일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엎드렸을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의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예배의 갈망을 지닌 그는 주일날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고, 그는 나팔소리 같은 주님의 음성과 더불어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면, “하늘의 보좌를 보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임재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예배자의 행복을 어린 아기가 엄마의 풍성한 젖꼭지를 물고 행복에 잠긴 것에 비유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기가 엄마의 임재를 확인하고, 엄마에 의해 자신의 필요가 공급되면서, 만족해하며 행복에 젖은 표정을 한번 연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이요, 주님의 임재체험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배를 갈망하는 마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는 마음은 예배자의 필수덕목입니다.
그리고 계3:22절의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이이야 말로 참된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풍성한 임재를 체험하며,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녹아내리는 행복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런 행복을 주일마다 아니 모든 예배의 순간마다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엎드림인 것입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음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여기 신.구약시대의 예배자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 “합당하오니”라는 말은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받으실만한 가치가 있으십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첨단과학으로도 아직 하나님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밖에 탐구하지 못한 창조의 경외감이야말로 우리가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과학과 예배는 동일하게 창조에 대한 놀라움으로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계시록 5장으로 넘어가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구속자이신 성자 하나님에게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계5:8절을 읽겠습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여러분, 이십사 장로들이 누구 앞에 엎드렸습니까?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왜 그들이 어린양 예수 앞에 엎드렸을까요?
계5:12절을 보면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했습니다.
여기에도 “합당하도다” 즉 “가치가 있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양 예수는 예배를 받을 가치가 충분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누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실 분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속죄의 어린양이 되사 우리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신비와 속죄의 신비, 즉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의 신비를 인하여 지금 사도 요한은 엎드려 성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 이십사 장로들은 예배하며 자기의 관을 벗어 주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에는 언제나 그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사랑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3. 예배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게 하는 특권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12지파가 등장하고, 신약에는 12제자가 등장합니다.
12+12가 이십사 장로들인데, 이들의 모습에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고, 금관을 썼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흰옷은 거룩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금관은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가지 특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품성 혹은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십니다.
그런데 왜 이십사 장로들이 이 두 가지 품성을 가진 자로 등장합니까?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들은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의롭게 되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신학적인 과제가 남아 있는데, 하나는 성화이며, 다른 하나는 영화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여기 24장로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성화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화의 완성상태가 바로 영화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십사 장로들에게 가능했을까요?
그들이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을 닮습니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느 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인하여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여러분, 거룩해지기 위해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의 몸부림이 주님의 거룩을 실현해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하고 진지한 예배의 성공자가 되면, 우리는 우리 영혼 속에 각인된 거룩함과 영화로움으로 반드시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영광이요, 임재체험인 것입니다.
4. 예배는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계5:14절에서, 하늘나라 예배는 아멘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예배가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계4-5장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의 예배를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6장에서 요한은, 다시 지상의 광경들을 목도하게 되는데, 하나하나의 인봉이 열리면서 전쟁, 기근, 질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보여집니다.
여러분, 이런 계시록의 구조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예배와 관련하여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아갈 세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계7:17절의 말씀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여기 방금 전까지 보좌에서 예배를 받으시던, 어린양 예수께서 이제 목자가 되어 거친 세상길을 걷는 우리 곁에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시고, 우리를 생명수 샘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예배만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찬양과 기도를 받기만 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예배한 사람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이제는 목자로서 우리 앞에 계시사 우리를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가 끝난 후,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고, 이제 문제와 갈등이 있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 사업 장, 그리고 우리의 고단한 세상 광야를 함께 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축복이요, 예배의 영광이며, 임재체험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가족들이 주일마다 아니 예배의 모든 순간순간마다, 한 평생 이런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동행 (누가복음 24:13-17) (0) | 2023.04.28 |
---|---|
고통을 이기는 위로 (마가복음 14:32-42) (0) | 2023.04.26 |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까? (느헤미야 5:14-19) (1) | 2023.04.24 |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16) (1) | 2023.04.23 |
모두를 영웅으로 만드는 팀웍 (출애굽기 18:13-27) (1) | 2023.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