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16)

Johnangel 2023. 4. 23. 23:46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0:1-16)

 

초대교회 성지 순례의 꽃은 터키에 있는 갑바도기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박해시대 때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어떤 고난을 감내하며 믿음의 삶을 살았는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이런 고난을 감내하였을까요?

그것은 훗날 주님 앞에서 그리고 후손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복음의 미래를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1세기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런 믿음생활을 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보면 적지 않은 배도와 변절,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딤전1:19-20절에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라고 했고, 그리고 딤후4:10절에서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이름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당장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 내일의 역사와 영원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부끄러운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극은 비단 후메내오, 알렉산더, 데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에 출발은 잘하였으나 나중에 부끄러운 자가 될 수 있고,

반면에 처음은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으나 나중 인생을 영광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일군의 비유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흥정의식 때문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마19:27-30절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솔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마19:2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이 아닙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보이지 않는 영생의 약속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삶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로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피부에 와닿는 손익계산상의 플러스, 즉 주는 것이 있었으면 구체적으로 얻는 것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주일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몸을 드려 봉사했으면 무엇인가 가시적인 축복이 내게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자식이 잘되거나, 장사가 잘되거나, 직장에서 승진을 한다거나 아니면 아파트 값이라도 오르든가 아니면 로또라도 당첨되든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 이 흥정이 시작되자 믿음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신앙생활이 손해본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위기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마19:29절을 읽겠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연생을 상속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반드시 배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흥정의식으로는 너는 이제 나중 된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19:30절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마태복음 20장 본문에서 포도원 일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 먼저 부름심을 받아 포도원 일군 된 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했고, 6-7절을 보면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단어가 반복됩니까?

“놀고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우리는 모두 인생을 낭비하고 무의미하게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어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신것만 해도 감사한데 일군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또한 은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식을 상실할 때, 흥정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우리에게 나중 됨의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2.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11절을 읽겠습니다.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그렇습니다.

오전 삼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 육시(정오12시) 구시(오후3시)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제 십일시(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자기들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원망합니까?

10절에 보면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중 온 자와 비교한 이것이 불평과 원망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의 그 어느 날 문득 내안에서 일어났던 불평들을 한번 성찰해 보십시오.

그 원인이 대부분 비교의식 때문인 것을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교하기 전까지 행복했던 내가 상대적 비교를 시작하자 갑자기 자신을 불행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 비교의식이 발전하면 질투도 되고 계급의식으로 자리잡기도 합니다.

 

지난 단기선교 여행에서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 사역일정 변경으로 비콜 시내에 나와서 두 시간정도 쇼핑 시간을 주었습니다.

모두가 다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버스에 물건들을 사가지고 와서 자랑을 하더니 갑자기 표정들이 시무룩해졌습니다.

자기보다 비슷한 물건을 더 싸게 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행복이 달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비교의식의 성경적 처방은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도 똑같지 않게 다르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따라서 인생의 가는 길이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 길을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옆집 아줌마처럼 꼭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다른 색깔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인생의 다양성의 멋이요,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불행은 획일화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다르게 살 자유를 허용하십시오.

당신의 방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하지도 마십시오.

그러면 비교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만 허락하신 그 삶의 정황을 감사하고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당신과 다른 이웃이 당신 곁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나는 나의 영역에서 언제나 먼저 된 자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 이미 당신은 나중됨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3.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더 받을 만큼 공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나는 당연히 더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로의식에 사로잡히는 순간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바로 섭섭 귀신입니다.

내가 이 집안에서, 이 직장에서, 혹은 이 교회에서, 이만큼 공로를 세웠는데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신앙생활의 감격도 상실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공로의식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출발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다윗왕은 자신의 기도실에 목동시절의 의상을 늘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는 목동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삼하7:18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라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장터에서 놀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 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공로의식을 극복하는 유일한 처방이 이 빚진자 의식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기도를 마무리하며 “공로없는 죄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혹은 다만 예수님의 공로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 그리고 그 구원의 주님을, 우리에게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하면 실로 우리는 빚진자에 불과합니다.

이 빚진자 의식이야 말로 우리를 겸허한 봉사자로 살게 하는 유일한 성경적 처방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 교회를 목양하던 폴리캅은 유대인들의 참소로 체포되어 총독 앞에 끌려옵니다.

총독은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그를 놓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폴리캅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깁니다.

“나는 86년간이나 그리스도를 섬겨왔오. 그분은 이제까지 한번도 나를 해롭게 하신일이 없건만 내가 어찌 나의 왕을 져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대인들과 로마 군사들은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작개비들을 모아 불을 지폈습니다.

폴리캅은 조용히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셨습니까? 그러면 이제 나를 태우시오. 내가 어찌 잠시 타다가 꺼질 불을 두려워하겠오. 어서 할 일을 하시오”

그리고 폴리캅은 기도를 시작합니다.

“오 주님 저를 구원해주시고 이렇게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세워주시니 웬 은혜입니까? 이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상하게 불이 그를 에워싸고 태우지 못하자, 한 군사가 칼을 들어 그의 옆구리를 찌르매 붉은 피가 솟구치며 그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훗날 다시 세운 이 폴리캅기념교회 천장에는 불란서의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Raymond Pere)가 그린 그의 순교성화가 그려있습니다.

그런데 군사 뒤에 두 손이 포승줄에 묶인 화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이겠습니까?

폴리갑의 순교는 바로 나를 대신한 순교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지만, 이 선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문자 그대로 수많은 순교자들의 값비싼 피의 강이 흐르고 흘러 우리가 마침내 복음의 소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빚진자들입니다.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빚진자들입니다.

이 빚진자의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방종할 수도 없고, 교만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한 평생 주님과 주의 백성들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빚진자의 의식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는 주의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총의 의식과 빚진자의 의식으로 산다면, 오히려 나중 된 자라도 먼저 되어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많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일세기의 성도들 즉 바울, 요한, 누가, 디모데, 오네시모,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브라 이들은 모두 자기시대 자신들의 삶의 장에서 복음의 빚진자로서 그 책임을 다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된 자의 책임을 다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시대의 먼저 된 자로서 당신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어떻게 복음의 빚을 갚으려 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처럼 그렇게 안이하게 사시다가 먼저 되고도 나중 된 자로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