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까? (느헤미야 5:14-19)

Johnangel 2023. 4. 24. 21:43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까? (느헤미야 5:14-19)

 

성공에 대하여 정의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성공과 성경적 관점에서 본 성공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공을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그 비판으로 자기가 성공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저는 설교에서 일단 성공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성경적인 의미로 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축복할 수 없는 성공은 결국 성공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성공의 의미는, 직장에서 보다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우러러보는 자리로 승급할 때, 혹은 돈을 많이 벌거나 돈을 많이 만질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될 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 소개하는 느헤미야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라고 시작합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샤 정부의 장관이라는 직책을 버리고, 조국 유대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을 때, 처음에 그는 자원봉사자의 자리에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어느 시점에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정식으로 유대 땅 총독의 자리에 임명됩니다.

이제 그는 유대 땅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서를 통해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은, 그는 한순간 총독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끝까지 성공자로 총독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이 사람에게서 배워야할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1. 성공의 기회를 책임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이 느헤미야라는 사람에 대하여 느끼는 가장 두드러진 소감은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느헤미야의 책임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총독이 되었다고 해서 어떤 유형의 자만감도 그에게서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은 그가 느낀 팽팽한 긴장과 부담 그리고 조국의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그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다”고 했고, 15절에서는 “이전의 총독과는 달리 백성을 압제 아니하였다”고 했고, 16절에서는 “성벽 공사에 힘을 다했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벼슬이 아닌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비극의 하나는, 소위 출세나 성공을 책임과 역할의 의미보다 더 높은 벼슬을 따는 것, 혹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가 우리 조상을 자랑할 때, 우리 조상이 무슨 벼슬을 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만, 사실 그가 그 벼슬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벼슬자리에 있을 때에 “이런 일을 이렇게 하셨다”라고 하면 그것은 자랑일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그 동안 우리의 맹목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향력이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사모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재능과 은사를 받은 우리 성도들이 되도록이면 책임있는 사회의 영역들에 진출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우리 성도들도 출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성공으로 자신의 신분상승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분상승이 아닌 책임과 역할이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 성공의 기회를 열망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앉게 될 자리나 신분 때문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맡게 될 책임과 역할 때문이어야 합니다.

성공을 책임과 역할로 수용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공의 기회를 섬김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성찰해 보면, 느헤미야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15절에 보면 “백성을 압제하였으나”라고 했고, 18절에 보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현실을 직시하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에도 보면 “그의 식탁에 손님만 150여명이 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총독의 자리는 바로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총독의 자리에 서면서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은,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만은 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실천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하여 15절에 보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의 섬김의 결심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이 백성을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섬김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근세사의 불행은, 이런 부르심 앞에 진정으로 사심없이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동기로 응답한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이 자숙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성공을 섬김의 기회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 각계각층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막10:45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섬김의 삶은 선택일수 없습니다.

섬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양식이어야 합니다.

섬김이 우리의 삶의 실존이요, 본질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언제나 자기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사람을 종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종에게 자기포기가 없다면 종의 사명을 수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론 새니(Lorne Sanny)는 말하기를 “종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그가 종처럼 부려질 때 정말 종처럼 행동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란, 주인이 맡긴 사명, 그 고귀한 명령을 위해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오늘 우리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요, 이 시대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3. 성공의 기회를 최선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16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의 자리에 있을 때, 무슨 땅을 사거나, 자기 개인의 안위를 위한 떡고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형제와 종자들도 그렇게 일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의 형제들과 참모들도 동일한 심정으로 주님의 소명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인들 왜 그의 노후복지에 관심이 없었겠습니까?

느헤미야인들 왜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가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것은, 매 순간 순간 느헤미야를 지배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때문이었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그 믿음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증거를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을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무슨 내용입니까?

내가 백성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으니, 내 나머지 인생은 주님께서 은혜로 책임져 달라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요, 기도였습니다.

딤후4:7-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다시 말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달렸으니 “이제 후로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상급주심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대이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역량을 넘어선 것은 어쩔 수 없지 모르지만 주어진 사역의 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그리스도인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곧 바로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서 퇴임한 후 더욱 큰 존경을 받고,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고, 세계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의 전령의 사명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그의 인생의 모토가 바로 최선이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이 모토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그가 채택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임관직전 해군제독과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던져진 후 제독은 그에게 해군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수한 성적을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독은 “잘했군”하는 칭찬대신에 다시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청년장교 카터는 땀을 흘리며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 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대답하자, 제독은 벼락같은 음성으로 되물었다고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그날 그 해군제독의 음성이 지미 카터에게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려왔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삶을 다 살고, 인생의 주인이신 우리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주님 앞에 섰을 때 똑같은 질문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나를 믿고 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 온 최선의 결과인가?” 그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렇게 고백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이라고 주님께서 반드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이런 성공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본문 14절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총독이 되었을 때의 삶의 태도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3. 본문이 보여주는 지도자로서 느헤미야가 백성을 대하는 태도는 무엇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4. 본문을 통해 성공을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