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동역의 관계를 넓혀라 (사도행전 9:1-9)

Johnangel 2023. 4. 30. 23:39

동역의 관계를 넓혀라 (사도행전 9:1-9)

 

1-2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을 내더라도, 사랑과 성령으로 일하는 것이 아닌 증오심과 분노 혹은 경쟁심으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증오심과 분노와 경쟁심으로 일하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 바울을 보면 열심의 원인은 사랑이 아니라 분노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부터 누구든지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기 바울의 다메섹도상에서 돌이킴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이런 변화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 누구나 돌이킴의 시간이 있습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여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우리가 변화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한 순간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변화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선교단체에서 강력한 간사라든지 혹은 지도하는 목사를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체험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말씀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분을 너무 신뢰하여 그분만이 진짜이고, 그분만이 하나님의 참 종이라고 생각하여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무슨 변화가 되느냐? 선교나 제자훈련만을 통해서 변화가 되는 것이다”라고 자기만의 방법을 너무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지 방법만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변화 받은 부분에 대해서 간증하고 강화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가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다른 방법을 통해서 변화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인정해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같이 변화된 사람이 있고, 요한과 같이 변화된 사람도 있고, 사울 같이 변화된 사람이 있듯이 각 사람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다른 것입니다

 

.2. 돌이킴의 있을 때는 반드시 그 특징이 있습니다.

 

생명의 빛이 내 심령 가운데 비춰오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체험을 개인적으로 군대 입대하기 전에 했었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안에서 자라다가 군대에 입대하기 전, 어머님과 함께 부흥회에 참석하여 제 삶의 이전과 이후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심령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을 때, 영광과 생명의 빛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도 동시에 온다는 것입니다.

8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돌이키고자 할 때, 하나님은 항상 과거와 끊어버리는 작업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처음 믿는 초신자들이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만, 예수 믿고 할렐루야 아멘하면서 변화되었는데, 곧 큰 어려움이 옵니다.

바울에게는 그것이 3일이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1주일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을 가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큰 성장이 있거나 내 사람의 궤도를 바꿀 때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지는 삶에 선을 확실하게 그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위대한 체험”을 한 후 그는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베드로 역시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체험”을 하고 난 후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선을 긋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새로운 사명을 향해서 사용하시기 위한 돌이킴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순간을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변장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다메섹의 체험으로 새로운 영역을 여는 은총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의 성장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엄청난 체험을 하게 한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관계 속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개인적인 엄청난 체험을 주시고 난 다음에 반드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엄청난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말씀을 직접 들었는데, 이것보다 더 큰 확신과 만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그 자리에 머물러두지 아니하시고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십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렇습니다.

아나니아를 통해서 바울 보이지 않는 눈을 보이게 만드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직접 눈을 보이게 만들 수 있고, 계시도 주실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동역자와 관계를 만들어 한 가지 한 가지 풀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악수의 손을 내밀고, 아무리 자기 혼자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동역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배우는 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동역자들과 관계를 맺고 사역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사람들, 특별히 의심스러운 영이 역사하는 사람을 보면 동역자들과 점점 관계를 끊어버리고 혼자만 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동역자들과 관계를 맺다보면, 자기신앙도 점검하게 되고, 신앙생활의 불균형에서 벗어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설교라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혼자 하나님께 영감을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모든 설교자들은 다 다른 사람에게 빚진 자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하는 설교 중에 최창훈 목사가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설교내용이 1%가 되겠습니까?

만약 나의 독창성이 1%정도만 되어도 주님으로부터 벼락 맞을 일입니다.

사실 설교라는 것은 2000년 동안 주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주셨던 영감을 빌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들에게 주셨던 영감, 어거스틴에게 주셨던 영감, 스펄전에게 주셨던 영감, 등 책을 통해서 얻은 내용을 보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100%의 독특한 설교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이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같은 영감, 같은 내용들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이 받은 말씀을 가슴에 품고, 내 가슴 속에서 예수의 피가 묻어나오게 증거하는 그것이 선교이고, 그것이 전도이고, 그것이 설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우리는 다 빚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두 다 연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계속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교회에서 더 많은 동역자들과 관계가 넓어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수많은 동역자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롬16장을 보면, 그의 동역자가 10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동역자는 점점 늘어납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동역자들과의 관계가 점점 넓어져가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내가 예수 믿은 지 5-10년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증거하는 일에 동역자의 관계가 한정되어 변함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행8:1절을 읽겠습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물론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의 한정된 관계만 너무 좋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도 다시 새바람이 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충만하게 무장된 싱싱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하나님의 일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 다니면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고,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사역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새 출발이 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우리와 교회들에게 항상 새로운 성령의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우리 안에 막혀있는 복음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도행전과 함께 영적으로 무장하여 주님의 비전인 복음증거를 위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새로운 지경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