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Johnangel 2023. 5. 28. 23:35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14-22)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단순한 GNP비교가 아니라 여러 조건을 종합하여 평가하면 미국이라는 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끼니를 굶는 가난한 이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그것도 미국입니다.

얼마 전 보고서를 보니까 약 410만 가구 1,100만 명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끼니를 굶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북한 인구 중 약 1,000만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면 실제로 북한 인구보다 더 많은 기아인구는 미국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국내 결식자 가운데 약2백만 명은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하는 날이 종종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려 2백만 명의 인구가 절대 영양 실조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미국 인구 중 약1%가 이 풍요의 나라에서 하루 한끼도 못먹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땅 다른 한편에서는, 한해에 무려 4,360만톤 즉 8톤 트럭으로 545만대 분량의 식량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풍요속의 빈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풍요속의 빈곤을 경험하고 있던 1세기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정 반대의 처지에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네가 궁핍한 것 같으나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 교회를 향해서는 17절에서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한 교회였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한 것 같으나 가난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소아시아 7교회 가운데 에베소 교회를 시작하여 오늘은 그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 도달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14절을 읽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이가 이르시되”

여기 아멘, 충성, 참됨이란 단어들은 모두 다 “주님의 신실성”을 뜻하는 단어들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신실하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아멘, 충성, 참된 증인이신 주님의 모습은 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고 반응하기만 하면, 아직도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질 희망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습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와 오늘의 우리 고현교회를 향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이 교회는 사데 교회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칭찬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받은 책망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열정의 상실”이고, 또 하나는 “자아성찰 능력의 상실”입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인근의 유명한 온천지대인 히에라볼리에서 온천수가 수도관을 통해 라오디게아 도시까지 오는 동안 온천수는 미지근해지고 이물질 등으로 오염되어 토해 버릴 수밖에 없는 상태를 닮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살아가면서 최대의 저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너는 이제 더 이상 쓸모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상태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목회를 할 때, 어느 한 부부를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 결정적인 동기는 부부싸움을 하다가 남편이 무심코 던진 “너 필요 없어. 나가”라는 한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 한마디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필요 없다고. 결혼하여 애낳고 기르고. 이제 겨우 살만하게 되니까 그래 내가 필요 없다고.”

바로 그 순간 이 여인은 더 이상 인생을 지속할 열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상태가 바로 그런 삶의 이유가 되는 “열정을 상실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아성찰의 능력까지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아상찰의 능력만 있으면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비극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신을 돌아 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즈음 말로 “자정의 능력”이라고 하는데, 여기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자신을 돌아볼 이 안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학자들은 “교만”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들을 둘러싼 외적인 풍요의 환경이 자신을 살피는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그렇습니다.

이 도시는 당시에 돈이 많아 금융업이 성행했고, 양모 의류사업으로 좋은 피복을 생산했으며, 이름난 안약을 많이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가난함과, 벌거벗음과, 그리고 보지 못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적으로 그들은 주님 보시기에 가난했고, 헐벗었고, 눈 먼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이 보시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3.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은 무엇입니까?

 

18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다시 말해서 은행에 쌓아둔 금이 아닌 시련의 금으로 흰옷 즉 “마음의 거룩함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과, 이 지역의 특산품 안약이 아닌 “성령의 통찰력으로 자신의 영적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권면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19절에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즉 “열심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태가 열심이 회복된 상태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주님이 다시 쓰실 수 있는 상태로의 회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목표로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본래 이 라오디게아는 온천지대와 좋은 물로 유명합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천수가 수도관을 통과하는 동안 석회질과 같은 이물질로 말미암아 물맛이 변질되어 먹지 못할 물이 된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성경적이 아닌 세속적인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주님이 쓰시기 어려운 상태로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139:23-24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시편기자는 기도합니다.

여기 아주 인상적인 세 동사 “나를 살펴주시고,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알게 하소서”는 회개의 첫 걸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녕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심의 자리로 돌아가서, 내 인생의 주인되신 그분의 손에 붙들려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사용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4.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웰빙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교회가 쓰임 받기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쓸모없이 되어버린 우리가 어떻게 다시 쓰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회복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첫 걸음을 나누었습니다.

바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가 전도할 때 이 구절을 자주 사용합니다만, 사실 이 말씀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얼마든지 주님을 “내 마음문 밖에 세워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주님과의 관계까지 단절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사랑 없이 한 지붕아래서 생존만 하는 부부처럼 얼마든지 교제는 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부터 해결하고,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는 애절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다시 식탁에 앉아 사랑을 나누는 교제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본래 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인의 집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골4:15에 보면 “라오디게아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정교회로 시작된 이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 가며, 주님과 성도들 사이의 친밀한 교제를 상실함으로써, 덩치는 컸지만 어느새 쓸모없는 교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목회하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면, 바로 우리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주일 예배만이 아닌, 가정에서 모이는 목장모임과 열린모임을 생명을 걸고 강조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눔바의 가정교회” 목장교회의 그 친밀한 삶의 한 복판으로 돌아갑시다.

우리의 존재를 열고, 마음을 열고, 우리의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그 목장모임에 주님께서 오셔서 함께 할 때, 우리는 다시한번 놀라운 은혜와 부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를 경험하고,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를 통해 반드시 세상을 치유하시고 바꾸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