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계시록 15:1~4)
요한계시록에 보면, 세 가지 재앙이 나오는데, 일곱 인의 재앙과 일곱 나팔의 재앙, 그리고 일곱 대적의 재앙이 순서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각각 그 재앙의 특징이 있습니다.
일곱 인의 재앙은 성도들에게 “말세를 이렇게 준비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일곱 나팔은 “정신을 차리고 살라”는 경고에 목적이 있으며, 일곱 대적의 재앙은 악인에 대한 심판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 심판은 시험하고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 시험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훈련을 했으면 그 목적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흔들리는 것일까요?
훈련은 많이 했는데, 그 목적이 사라져 버리니까 사람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련을 많이 했다면, 반드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시험이 있어야 하고 심판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은 준비된 사람에게는 축복이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저주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일 큰 고민은 목적을 상실했을 때 “고난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때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헷갈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아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계십니다.
선교사들이 이방족속에게 가서 선교하니까 얼마나 헌신적입니까?
그런데 몇 년전 캄보디아에서 사역하던 선교사 가운데 제가 잘 아는 후배 오영수 선교사님의 가족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입니까?
“이상하다! 주의 일을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나!”라고 생각하며 헷갈리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뭐 그렇게 대단한 신앙을 가졌다고 너 혼자만 그러느냐. 적당히 타협하고 평범하게 살자, 왜 그렇게 너 혼자만 유별나게 사느냐. 대충 대충 믿고 살면 더 편하고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제일 큰 위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끝이 아닌데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430년 동안의 종살이를 끝내고 출애굽을 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고,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홍해가 앞을 가로막았을 때 말씀대로 순종한 꼴이 이거냐”며 절망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까 “더 큰 위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갈 때 구원함을 얻었고,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는 홍해에서 모두 죽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한 생을 살아갈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의 고난은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판의 큰 인생을 살려고 한다”면 고난이 많아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 인생이 뒤집어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평범한 것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고전10:1~2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세례란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들어갈 때는 죽음이지만, 올라올 때는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로 다시 살아남이 “홍해 사건”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라는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죄로부터의 죽음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우리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떠나면서 애굽에서의 모든 죄악의 인연들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서 항상 애굽 애굽 애굽하며, 애굽에 대한 향수에 연연해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습니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악의 인연들을 끊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끊지 못하는 것을 고난을 통해 완전히 끊어버리게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에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는 만화책에 보면, 각 구단에서 쫓겨나 고생하던 선수들을 모아서 동병상련의 동지적 결합으로 하나 되게 만들어 강력한 팀이 되어 모든 구단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매년마다 단기선교를 나가서 저녁 늦게까지 사역을 하고 아침에 깨었을 때, 고단함과 졸림 그리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경험하다보면 전체가 하나 됨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생각 해 보십시오.
우리가 1대1로 만나서 매주 1시간씩 교제한다고 합시다.
1년 동안 매주 1시간씩 교제해 봐야 52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기선교를 가서 2일이 지나면 48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교지에서 5박6일을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덕적 감화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우리는 고난의 동참을 통해서 하나 됨을 느끼는 것입니다.
정금은 고난의 불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순금은 고난의 용광로를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금은 불 속에 들어가야만 “내가 진짜 금이라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험난한 상황은 진짜와 가짜를 갈라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역의 현장에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 때문에 나의 정금됨이 더욱 빛이 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사역을 “내 능력으로 하는지,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는지”는 고난을 당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는 사역은 열매도 없고, 타버린 성냥불같이 재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힘으로 하는 사역은 살아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의 시련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비결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은 임해야 합니다.
고난을 환영합시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을 통해서 내가 영광을 받는 것이지,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14:19~20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음으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스라엘을 지키면서 그들을 대신하여 애굽 군대와 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당하면서 어두운 밤길에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면서 밝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두움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장래가 어둡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불기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불기둥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갈 길을 모릅니까?
우리가 “낮에 더워서 어떻게 사느냐? 광야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염려하는 것은, 몰라서 그렇지 우리에게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라는 하나님의 파라솔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파라솔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에게는 환경에 관계없이 밝은 길과 인도하는 빛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또한 그 빛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입니다.
원수가 추격할 때는 그들이 뜨거워서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아주십니다.
우리가 전진할 때는 우리 앞에 가다가, 우리가 쉴 때는 우리의 뒤로 와서 적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줍니다.
그런 불기둥과 구름기둥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두려워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없고, 기둥서방만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있습니까?
그것만 있으면 원수의 공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으로 승리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떤 때는 홍해로 이끄실 때가 있고, 광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시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우리가 끊지 못하는 것을 끊게 만들고, 오히려 고난은 나의 정금 같은 모습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설명은 다 잊어버려도 괜찮습니다.
오직 믿음 하나만 붙들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하나만 붙들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동 걸면 자동차가 가더라”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말씀 하나만 믿음으로 붙들면 만사형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출15장은, 홍해를 건너고 난 다음에 불렀던 이스라엘 백성의 찬송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고 난 다음에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는 왜 이런 찬송이 없을까요?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내가 체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찬송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은혜를 체험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을 느끼기 때문에 감격의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깊은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면, 출15장을 보면서 여러분의 눈에도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이 보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서도 하나님을 향한 통쾌한 찬송이 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 가운데도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홍해는 나에게는 영광이요, 적군에게는 사망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고난의 용광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무장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에 현장에서 오히려 나를 영광스럽게 만들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에게 임하게 만드는 첩경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
내 앞에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내가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 고난을 통과했을 때 영광이 드러날 줄로 확신합니다.
이 시간 “정금 같은 믿음을 달라”고 다같이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고난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금 같은 믿음으로 무장된 우리 교회의 사역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오히려 고난 때문에 우리의 정금됨이 들러나게 될 줄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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