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고향으로 가는 길 (누가복음 15:17-24)

Johnangel 2023. 5. 26. 14:59

고향으로 가는 길 (누가복음 15:17-24)

 

시인 정호승의 대표적인 시집 가운데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보면 이런 시가 있습니다.

“강가에 초승달 뜬다/연어 떼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나그네 한 사람이 술에 취해/길가에 엎드려 있다/연어 한 마리가 나그네의 가슴에/뜨겁게 산란을 하고/고요히 숨을 거둔다”

시인 정호승씨는 죽음에 이르는 인생 여정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를 사랑에서 찾았고, 죽음의 비유를 연어 떼의 귀향에서 발견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연어는 모천 회귀성 어류로써, 귀소본능과 모험의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자신이 태어난 좁은 고향을 떠나 수천리 때로는 수만리 넓은 바다로 여행을 떠나 살다가 산란할 때가 되면, 그는 그가 가진 예민한 후각을 사용하여 모천의 냄새를 따라 정확하게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저의 고향은 김제입니다.

저는 25년이 넘는 제 인생의 세월을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1992년에 익산으로 내려와 어느 날 저는 김제 고향 집에 가면서 고향 가까이에 와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바로 한 마리의 연어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향 길을 가는 한 아들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위 탕자의 귀향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고향 길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아버지 하나님의 품이 우리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본문의 비유를 가르쳐 “탕자의 비유”라고 불러왔고, 따라서 당연히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 곧 탕자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본문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 아들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재산을 먼 나라에 가서 모두 낭비해 버린 여기 탕자를 가르쳐 “낭비하는 아들”이라고 해석하는 한편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이 아버지 또한 “낭비하는 아버지였다”고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낭비하는 아버지였을까요?

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낭비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넉넉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품이야말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와야 했었던 그의 궁극적인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21절에서 이 아버지의 품을 단순히 인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품이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와 참회의 고백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가 참회의 대상으로 하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습니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 말로 집을 떠난 우리 인간이 돌아와야 할 영혼의 본향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고향이란 지리적인 공간이상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온 인격적인 관계의 근원이라는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아마 명절에 고향을 찾지 않으시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고향에 더 이상 내가 만나야 할 분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향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제와 자매들, 어릴 적 친구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를 지니는 곳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가장 깊숙한 그리움을 가르쳐 “아버지에 대한 굶주림”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아버지 부재”현상이야 말로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정신적 방황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우리가 찾고 기다리던 우리의 고향, 우리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 바로 그곳이 우리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실향민처럼 방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고향이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2. 고향에는 우리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둘째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가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한마디로 그는 먼 나라에서 육체적으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별수 없이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혐오하던 돼지들의 쥐엄 열매로 굶주린 창자를 채워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동안 그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그는 죄책감과 소외감 속에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춥고 굶주린 영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고향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따뜻한 배부름이었습니다.

이 배부름은 근본적으로 굶주린 사랑의 배부름이었습니다.

 

우선 고향에는 용서와 용납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다”고 죄책감으로 두려워 떨고 있었던 아들을 아버지는 측은이 여기시며 달려가 목을 안고 우시며 입을 맞추셨습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용서와 용납의 그림입니까?

그는 더 이상 소외될 필요도, 거절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을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는 순간 그는 조건없는 아버지의 용서와 용납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의 고향이요, 그곳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품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향에는 아들을 위한 신분의 회복과 새 출발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시며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요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이제부터는 아들이 아닌 종으로서의 처우를 각오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벽하게 아들로서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새로운 옷과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새로운 신 을 선물로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축복이었습니다.

따라서 고향의 잔치는 과거를 청산하는 잔치였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떠나는 축복의 잔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향은 우리에게 과거로 돌아오도록 손짓하는 곳이 아니라, 고향의 사랑을 먹고 다시 미래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보내는 파송의 마당인 것입니다.

마치 따뜻한 고향의 들녁에서 거친 도회지로 우리를 떠나보내며, 오래 오래 동안 손을 흔들고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을 확인하며, 새로운 삶과 부끄럼 없는 삶을 결심하는 자식들이 되어 이제 우리는 약속의 내일을 향해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 곳이 바로 고향이요, 그 곳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품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 고향, 그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3. 돌이킴이 고향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기에 “돌이켜”라는 말은 “본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오래만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아버지를 떠나 방황하는 자신의 비참한 실존의 모습을 의식하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며아버지를 떠난 것을 아파하며 뉘우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란 뉘우치는 감정 이상으로 의지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했습니다.

이 결단이 진정한 회개요, 바로 고향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아십니까?

오늘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들이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요14:6절을 보면,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그분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까?

인간과 하나님사이를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책감은 하나님께 나아오려는 모든 사람의 발목을 잡는 무거운 쇠사슬인 것입니다.

여기 탕자도 “과연 아버지가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받아 주실까? 그는 내게 소리치며 내 집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실까?”하며 얼마나 주저하였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인 바리새 종교인들은 그런 무서운 경찰관과 같은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벽하게 회복하지 않는 한 결코 가까이 하지 않으시고 심판하고 저주하실 하나님으로 알고, 이런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 스스로 일체의 부도덕한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분의 삶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세리와 창기의 친구를 자청하며, 그들을 찾아가 어울리시며 함께 먹고, 그들을 안아주신 것입니다.

눅15:1-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사실 본문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버지는 바리새인들이 상상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돌아오는 아들을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바로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가 받을 심판과 저주를 대신하시고, 이제 그를 구원의 주로 붙드는 자들을 조건없이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자신의 완벽한 자녀로 우리의 신분을 회복하시고 우리의 축복된 미래를 언약하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다음에 보면, 자신의 동생이 돌아왔는데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저런 자식은 내 손에 죽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맏아들 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를 맞아주신 하나님이 이 맏아들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입니까?

그런데 이 맏아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하나님이 바로 바리새인들이 믿고 있었던 “정죄하시는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그 피에 자신의 누추한 존재를 적시는 사람마다 두려움없이 용서받은 자로, 사랑받은 자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새롭고도 산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분이 바로 우리가 고향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신 것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 나아갈 길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 받은 자, 사랑 받은 자, 구원 받은 자로 우리를 이끄시는 선한 목자 되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우리의 영원한 고향에 도달하는 그날까지 아직도 고향을 몰라 추위에 떠는 우리 이웃들의 손을 잡고 사랑을 전하기 위한 새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정호승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쓴 또 하나의 시 “연어”를 인용하는 것으로 메시지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만인가/거친 폭포를 뛰어넘어/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나는 단지 한 마리의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울지 마라/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보다 더 강한 죽음까지도 삼켜버리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납하시고 천국의 본향을 예비해 주신 예수님을 따라 영생을 누리며 사랑을 나누기 위한 고향 가는 길로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접기도

사랑의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 또 주님으로 내 마음에 모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지금 나의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 위에서 다 해결해 주신 예수님 나를 용서하시고 내게도 영생을 주옵소서. 이제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 또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