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일의 성취보다 존재가치에 집중합시다 (누가복음 10:38-42)

Johnangel 2023. 6. 1. 22:13

일의 성취보다 존재가치에 집중합시다 (누가복음 10:38-42)

                                              

오늘 본문을 설명함에 있어서 발생하는 가장 큰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마르다는 무조건 잘못했고 마리아는 잘 했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 묵상은 그 어떤 봉사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해석을 우리가 정당하게 수용하여 모든 교회의 마르다들이, 식당 봉사도, 교회 안내도, 목장도, 전도도, 다 포기하고 예배와 성경 공부에만 열중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은 결코 “마르다의 섬김 그 자체를 비판하신 일이 없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마르다가 많은 일을 하면서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마르다가 많은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감사함으로 할 수만 있었다면, 마르다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런 마르다와 같은 자들의 헌신에 빚진바가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문제는 마르다의 봉사에 마리아의 영성을 조화시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여자 사건을 통해 감사의 영성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섬김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것일까요?

 

1. 성취보다 존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써 정신 분석가요 사상가인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 가치관의 영향으로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성취가 인생을 행복하게 하리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은 비움과 나눔의 삶을 통해 풍성한 존재의 보람을 누리게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적 가치관에서 존재는 언제나 소유보다 앞서는 중요성을 갖습니다.

딤후3:16-17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다시 말해서 “인격의 온전함이 행위의 온전함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을까요?

저는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주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든다. 따라서 내가 먼저 살아야 그 능력으로 주님과 이웃을 잘 섬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함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마르다는 염려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르다는 존재가 행위보다 앞서는 것을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딤후3:5절에서 바울은 집사 임명의 원리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아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자가 여러 가지 많은 일에 뛰어 들면 그는 존재의 성숙함이 없기 때문에 그 일들로 말미암아 교만해진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습니까?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한 존재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이 지난 해 많은 일을 시도하고서도 만약 이 시간 마음에 허탈함이 있으시다면, 이제 다시 나의 존재를 고민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의 성취보다 하나님 자녀로서 존재의 성숙함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2. 비교 보다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르다의 불평과 원망은 무엇에서 연유했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마리아와 비교한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교하는 그 순간 자신은, 뼈 빠지게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데 주님 앞에서 팔자 좋게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미워진 것입니다.

40절을 읽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여러분, 마르다의 불평스런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비교 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C.S.루이스 교수는 “사단의 가장 예리한 무기가 바로 비교 의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교 의식 때문에 우리는 존재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섬김의 감격을 상실합니다.

봉사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그런데 만약 마르다가 비교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집중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제 마르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마르다가 내 사명은 “섬기는 것”이라고 확신했다면, 자신에게 아직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을 것이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도 감사했을 것이고, 자기에게 아직도 일거리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 예수님을 직접 자기 집에 모시고 대접하게 된 것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주님을 생각한 것도 아니고, 자기의 사명을 생각한 것도 아니라, 주님 발치에 앉아 있는 괴씸한 동생 마리아를 생각하며 불평하고 원망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아주 흥미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며 “그가 한때는 주님을 배신했지만 그의 마지막 죽음은 영광스런 죽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자신의 장렬한 최후를 묵상하며, 자기의 마지막 사명을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21:21절에 보면, 베드로는 옆에 있는 요한을 보고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니까?”라고 아주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조차 이런 비교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베드로의 평생 라이벌이었고, 베드로는 요한과 자신을 비교하는 비교의식에서 평생 헤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요21:2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너는 “비교하지 말고 네 사명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우리가 2012년 새해를 맞이하여 감사한 마음도, 기쁜 마음도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 나보다 더 잘 사는 이웃들과 나를 비교하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비교가 아닌 당신의 사명에 집중하실 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불평 보다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40절에는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고 했고, 41절에서는 예수님이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너무 많은 일을 벌려 놓고 염려와 근심으로 마음이 눌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르다는 과격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돕지 않고 있는 동생을 비난하고, 원망하며, 예수님께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39절을 읽겠습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라”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눈동자를 주님께 고정시키고 예수님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받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말씀이 곧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곧 소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곧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마리아는 언니가 주님께 자신을 일러바치고 불평하고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다만 조용히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42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마디 말씀에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한 자는 어떤 환경이나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삽니다.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인생을 삽니다.

 

최악의 고난 중에도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으로 자신의 두 아들을 잃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손양원 목사님께서도 인간이시기 때문에 “내가 이 고난을 감수하며 나병환자를 돌보며 목회하는 것을 아시고도 어찌하여 내 두 아들까지 데려 가시느냐?”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불평할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불평대신 말씀에 집중하셨습니다.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의 9가지 감사를 들어 보십시오.

1.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허다한 성도들 중에 이런 보배를 내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3.삼남 삼녀 중에서 가장 귀한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4.한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두아들이 순교할 수 있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5.예수 믿는 사람은 병들어 죽어도 복인데 전도하다 순교했으니 감사합니다.

6.아들들이 미국으로 유학가려고 했는데 그보다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8.내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서 무수한 천국의 열매가 생길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9.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몇 년 전 제가 여수 애양원에 갔다가 “손양원 목사님 기념박물관”에서 봉투 한 장을 발견하고, 충격 속에 그 자리를 뜨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두 아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다음 주일날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께 드린 감사헌금 봉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손 양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가 80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봉투 겉장에 “손양원. 감사헌금 1만원”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마음에 불평이 있으십니까?

여수 애양원을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거기서 진정한 감사의 영성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하고 살고 싶으시다면, 성취보다 존재에 집중하십시오.

비교보다 사명에 집중하십시오.

불평보다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루 하루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최고의 존재가치를 경험하고 체험하시는 축복의 날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