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얻으라 (갈라디아 2:1-10)

Johnangel 2023. 6. 3. 00:01

더불어 사는 지혜를 얻으라 (갈라디아 2:1-10)

                                              

오늘날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왕따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따”라고 말하는 “자기 스스로 따돌림”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위축되어 마음의 벽을 쌓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우리 성도들이 “왕따”뿐 아니라 “자따” 또한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오셔서 죄인과 더불어 사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에 기독교의 역동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음에 드는 한 두 사람이 아닌 열두 명을 팀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도 둘씩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 최소한 두 사람이 함께 가서 서로 격려하며, 네트워킹 하는 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사도바울은 혼자서 사역을 독점하지 않고 더불어 사역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유무상통하며 가르침에 함께 열심을 내었습니다.

여기 바울이 “팀을 이루어서 전도여행을 했다”는 것은 “더불어 복음 사역하는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 날 현대교회는 그 공동체성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세 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거짓형제들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다시 말해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이단이 몰래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이 누리는 자유를 엿보려고 정탐꾼처럼 끼어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형제 곧 가짜 신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초창기부터 이렇게 복음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려는 무리가 계속 요동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갈1:7절을 읽겠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성도들이 지역교회에서 든든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 마음을 이간시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교리를 따르게 하는 이단이나 불건전한 사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미지만 속은 엉터리입니다.

그 결과 이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복음을 변질시키고, 훼손시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똑똑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종말은 지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의 영향 때문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복음의 경주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5:7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여기에서 말씀하는 달음질은 교회생활 곧, 믿음의 경주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잘 믿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나쁜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그들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20:2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 “사나운 이리” 곧, 거짓교사들을 경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것을 예고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지도자들과 하나가 되어 더불어 살지 아니하면 이 영적인 전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고현교회가 이 지역사회에 향도적인 사명을 감당하고, 등대처럼 쓰임받기 위해서 우리 성도들이 하나로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 “복음의 진리로 항상 있게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아름답게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이 복음의 체질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머리에만 있는 복음이 아니라 가슴이 뜨거워지고 생활로 옮겨지는 복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군중속의 무리와 공동체의 멤버는 다른 것입니다.

무리는 직위가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멤버들은 교회의 영적, 재정적,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각 가정이나 교회마다 어려움을 당해보면, 가정과 교회 회복과 가정과 교회 해체라는 상반된 현상이 일어납니다.

왜 똑같은 상황 속에서 결과는 이렇게 다른 것일까요?

그 상황을 대하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선순환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악순환을 만들 것인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미국 윌로우크릭교회의 소그룹사역을 담당하는 빌 도나휴(Bill Donahue) 박사는 성령의 공동체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을 따라 살며 서로를 세워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몸이다”

그렇습니다.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공동체성이 회복됩니다.

교회에서는 예배공동체로, 그리고 주중에는 각 목장모임으로 이 복된 일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함께 모였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 앞에 나가는 작업이 필요한 것입니다.

 

강원도 “황지 예수원” 원장으로 봉직하셨던 대천덕 신부님은 “개인적인 만족감만을 추구하는 성도들의 ‘영적 이기성’때문에 한국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만족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이 행복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게 될 때, 자신의 영혼도 채워집니다.

요5:4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우리 인간들끼리의 영광은 서로 취하려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음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다면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 상호간의 영광을 취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사모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나만의 유익이 아닌 교회의 역할과 기능을 잘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더불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강력한 복음전파를 위해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됩니다.

 

7-9절을 읽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은 것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고현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복음전파를 위해 우리 모두는 더불어 손을 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라도 혼자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전파의 과업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네트워킹을 이루어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교제의 악수는 “강력한 복음전파를 위한 악수로 만남에 대한 축복과 상호 인정과 용납을 의미”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사도 중에 대표성을 가졌지만, 그 마음의 울타리를

뛰어 넘어서 자신들은 유대인을 위한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임을 알고 서로 교제의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따라서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예배와 봉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과 교회본질의 회복을 위해 연합하여 거룩한 네트워킹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불어 사는 지혜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먼저,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데 열정을 가져야 됩니다.

복음의 진리를 나누는 우리의 목장모임은 정보 전달뿐 아니라 영적인 인격형성과 배가번식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입술만이 아니라 삶으로 배우고 가르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주도적으로 교제에 임하여야 합니다.

주도적인 사람이 세상을 이끌어 갑니다.

복음은 주도적입니다.

주님은 주도적으로 이 땅에 오셨고, 죄인을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를 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을 알고도 소극적으로 산다면, 과연 그 복음이 우리 속에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현의 믿음의 가족 여러분!

기독교 역사 2천년동안에 교회는 내부의 적들과 외부의 적들에게 시달렸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금까지 든든하게 서왔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따르며, 성도와 지도자가 한 마음이 되어 거짓형제들의 도전에 단호히 대처합시다.

교회 공동체의 맴버로서 공동체성을 회복하여 개인적인 만족감만 추구하는 영적 이기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구제를 통한 가난한 이웃의 행복을 추구함으로 복음을 보존하며 삽시다.

그리고 함께 영적 네트워킹을 이루어 강력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지혜롭게 감당하는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