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세례, 진정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8)

Johnangel 2023. 6. 25. 16:54

세례, 진정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8)

 

마태복음 1장을 펼치면 긴 족보가 나오고, 2장을 보면 예수 탄생에 관해 긴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 모든 것을 생략하고 바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합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지던 때는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하던 시기입니다. 박해 받은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성경이 마가복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합니다. 교회는 할 일이 많습니다.

결혼식 주례도 하고, 장례식도 집전해야 하고, 아픈 사람 심방도 가고….

그러나 오늘날처럼 교회가 복음이 잘 드러나지 않는 때는 거두절미하고 절박한 위기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만이 희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들을 살려낼  능력이다.’고 선포해야 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합니다.

내가 너무 느슨하게 목회하고 있지 않는가고. 이 시대 사람들은 카타콤으로 숨어드는 것 같은 영적인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교회 안에 복음이 더 많이 드러나고, 복음의 능력이 더 나타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더 강하게 선포해야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의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선포가 있고, 4절에 세례가 나옵니다.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관문이 세례입니다.

4절은 요한이 베푼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원어는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입니다. 단순히 행위적인 잘못을 뉘우치는 차원의 단어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 내 속사람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이런 것들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이것은 도덕적․윤리적 잘못을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물로 세례를 받은 여러분들은 이 행위 속에 회개의 세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것 같은 가치관을 내려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선언하고 갈망’하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없이 제멋대로 살던 둘째 아들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음을 자각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정신이라 정의해 봅니다.

오늘 이 세례식을 통해 여러분의 내면세계에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선언하고, 방향을 선회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귀한 세례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의 엑기스를 담고 있는 마가복음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4절에서 회개의 세례가 베풀어지는데, 8절에는 또 다른 세례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베푸는 물세례는 죄를 깨끗하게 하는 그런 기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나는 죄를 깨끗하게 씻어야 할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를 갈망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절차와 절기에 따라 어김없이 물세례가 베풀어지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가 잘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만 있고, 담임 목사의 세례만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나타나지 않으면,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는 불교를 인간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도를 닦고, 선을 추구하는 종교가 불교라면,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종교다고 말하지만, 부끄럽게도 기독교는 타락하여 변질된 인간의 종교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6~27절을 읽으면 제 마음이 찢어집니다.

엘리야는 무능한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을 비아냥거리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입장이 바꿔져 버렸습니다. 오늘날은 세상이 교회를 조롱합니다.

‘너희 하나님 죽은 것 아니야.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목사들이 저럴 수 있어. 예수쟁이들이 이렇게 부도덕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는 당당하게 하나님 이름으로 세상을 꾸짖고 무능한 자들이여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선포하던 엘리야와 같은 기백이 없어졌습니다.

오늘 교회는 만날 꾸중 듣고 삽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한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합니다. ‘

야, 너희들 진짜 너무하다.

그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냐. 너도 하나님 믿냐. 하나님 살아계시면 어찌 그런 짓을 하냐.’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교회 안에서 거행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가 계속 일어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례요한의 종교, 인간의 종교가 되고 맙니다. 불교인들은 윤회설을 믿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불교신자들 중에는 머리가 숙여지는 분이 한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떠넘겨놓고,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니 제 마음이 아픕니다.

세례식이 있는 날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까도 나오는데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안하고 싶었습니다. ‘

하나님,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게 쇼하는 거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례를 받으나 안 받으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 현실을 타개해 나갈 대안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 살았나 이런 차원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버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성령세례가 일어나지 않는데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 이런 상태. 그러면서도 일요일이면 아무 갈등 없이 성경책을 들고 교회 오는 이런 무기력한 종교생활이 반복되는 한 기독교는 오늘 인간의 종교입니다.

세상에 수치스러운 인간의 종교가 오늘 우리 기독교가 아닙니까.

 

세례 받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세례를 준비하면서 심령의 회개가 있었습니까.

마음이 아팠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 내 상태가 괴로웠습니까.

어느 날 나 자신을 보니, 탕자처럼 하나님 품안을 떠나버린 것 같은 혼미한 내 심령에 고통과 갈증이 있었습니까.

이거 없는 이 절차적인 물세례는 그저 의식일 뿐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갈망하는 심령의 회개입니다.

이것이 일어나지 않으면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요, 하나님이 침묵하고 일하지 않는 한 코미디 같은 집단입니다.

 

다윗이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바세바를 성적으로 범하고 나서도 얼마나 뻔뻔했습니까.

주의 종 나단이 찾아가 꾸짖자, 영적으로 자각하고 강퍅했던 다윗이 꼬꾸라지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절규하며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귀담아 볼 한 구절이 나옵니다.

11절 12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진정한 회개가 터지고 난 다음 제일 두려웠던 것은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아십니까. 다윗처럼 들키지 않으면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믿음의 대가인 것처럼 떠들고 있지만, 제가 얼마나 한심한 인간인지 아십니까.

나를 비판하는 게시판의 글이 두려운 사람입니다.

‘네가 목사야’ 그런 글이 무서운 사람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질타할 때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실까, 얼마나 슬퍼하실까, 이런 것들이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참회하고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범죄하고도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여전히 훌륭한 목사라고 칭송할지라도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나면 그건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이 민감함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얼굴 들고 다니기가 부끄럽습니다.

 

저는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 스스로 목사가 되었지만, 아이들은 아버지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너의 아버지 목사야. 어쩌다 그렇게 됐냐.’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나는 날마다 꿈을 꿉니다.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교회의 목회자 자녀들이 자기 아버지가 목회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러기 위해서는 물세례만 있는 종교생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본질의 회복, 회개의 회복, 메타노니아의 회복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조화를 이룰 때 회복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일하심의 조화를 통한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함께 일어나는 크리스천이 될 때 하나님의 침묵은 끝이 나고 하나님은 일하시게 됩니다.

제가 마음이 힘들 때 하나님은 저를 만져주십니다.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힘들고 마음이 무거운데 저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얼마 전 교회에 잘 나오지 않던 중등부 학생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가정적으로 많이 힘든 아이입니다.

오래전 부모님이 이혼하고 각기 다른 사람과 동거하고 있습니다.

이걸 견디지 못해 그 애 언니가 얼마 전 자살했습니다.

언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 아이도 자살을 결심했고, 자살하려고 했는데 중등부 목사님 얼굴이 떠올라 한 달여 만에 교회 와서 그동안의 아픔을 토해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우울증 증세가 있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의 친구들과 목사님의 애씀,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융화가 되니까 이 아이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 것입니다.

아이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이는 “목사님, 나 살고 싶어요. 엄마를 위해서도 행복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아이를 살려놓은 원동력은 메타노이아입니다.

선생과 친구들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이 아이에 임하니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살아계신 것 맞죠. 우리들이 범죄하고 배교하므로 침묵하시는 것이지, 오늘도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회개의 세례를 갈망할 때 이런 역사는 계속 일어날 줄 믿습니다.

 

오늘도 메타노이아, 회개의 세례를 갈망하는 심령 속에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교회를 견인하는 것은 제가 아니고, 어떤 믿음 있는 사람도 아니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자각하고, 우리 심령 안에 4절의 메타노이아와 8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세례하심이 우리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오랜 침묵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되는 영적부흥이 일어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