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한 몸으로서의 교회 (고린도전서 12:12-20)

Johnangel 2023. 6. 23. 09:51

한 몸으로서의 교회 (고린도전서 12:12-20)

                                            

여러분은 교회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화관광부는 2011년 2월28일 기준으로 기독교 17개 교단의 성도 수를 1182만 5001명으로 집계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수는 3만 9421개이며, 목사는 7만 3678명으로 한교회당 평균 1.9명의 목사가 시무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성도들이 평생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경적 교회관을 갖지 못함으로 인하여 교회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교회의 본질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예수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엡1:22-23절을 읽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물론 교파도 아닙니다.

조직도 압니다.

교회는 유기적 공동체로써 살아있으며, 걸어 다니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머리십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이 건물은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이라 것은 예배드리는 집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존 스타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복음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구속사의 중심이고, 신앙의 중심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십니까?

12절을 읽겠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구세주이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를 믿고 구원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은 보이지 않는 그의 몸의 공동체를 통해 이 땅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과 우리 성도의 관계는 “주와 종”의 관계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를 세우시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남녀의 성별 차이, 언어와 피부 색깔의 차이, 문화와 개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절에 교회가 탄생한 것은, 구원과 교회의 관계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국의 1200만의 신자들과 4만여 개의 한국교회도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요, 하나의 가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그분의 손과 발, 눈과 귀로 주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다양한 지체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모든 지체는 자신만의 독특한 은사가 있습니다.

또한 모두가 자기 몫의 섬김과 봉사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받은 독특한 한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그 기능을 가지고 서로를 섬기고 봉사하는 은사공동체가 바로 교회의 성경적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은사와 은사의 연합, 지체와 지체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헌신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병들고 절뚝거리며,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적인 삶의 성향으로 인하여,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고린도교회처럼 분열과 다툼과 탐욕의 소굴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모르는 복음에 대한 무지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지체의식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안의 성도들을 서로 다른 지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어야 합니다.

자신을 용납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은사를 인정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은사와 직분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욱 큰 은사”는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버려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15-16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우리 성도들이 자아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를 섬길 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특별한 봉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특별한 봉사를 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자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아에서 해방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봉사나 은사에 대한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만의 다른 얼굴은 비교의식과 열등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가 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은 우월감입니다.

이 모습은 다른 지체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태도로서 우리가 아직도 자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에는 필요 없는 존재, 무용지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교회되려면 부자만 모이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똑똑한 사람뿐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3. 희생으로서 완성됩니다.

22-25절을 읽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t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①우리는 한교회 안에서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몸에 서로 다른 지체를 두신 것은 몸이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기능과 지체가 있는 이유는, 바로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서로를 향해서 “저 사람은 우리 교회에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어리석은 말을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신체 중 “어떤 부분이 필요없다”고 잘라내 버리는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 안에서 가끔 어떤 사람을 보면, 자신이 맡은 부서가 “최고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자기가 맡은 일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종종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 안에서는 이런 자세가 절대로 옳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필요성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부서만이 꼭 필요하고, 내가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②우리 몸에 보다 중요한 부분과 열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몸 전체로 생각해 볼 때, 그 중요성은 그다지 문제가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 가운데 어느 한 기능이 정지하면, 몸 전체의 균형이 파괴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심장은 대단히 중요한 기관입니다.

그런데 심장 자체가 어떤 충격을 받지 않더라도 혈관에 문제가 생기면 심장도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이 깨져 버리고 생명에 지대한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하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는 것은 몸 전체의 균형이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자기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만의 역할을 너무 부각시키고, 다른 부분의 역할을 무시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 존경하며 인정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과 동등하게 다른 사람이 섬기는 일에 대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인정하고 서로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교회는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고현교회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보다 성숙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③교회도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은사와 기능이 아무리 작더라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고, 내가 하늘같이 큰 은사와 기능을 가졌다고 해도 아주 작은 기능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은사와 기능과 봉사가 크든 작든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 줄 수 없고, 내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은 죄의 본성입니다.

귀하고, 덜 귀하고, 아름답고, 덜 아름다움의 기준은 세상적입니다.

교회는 외모가 경쟁력이 아닙니다.

진정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아가 해방되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지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을 따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④26절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한 몸임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내가 속한 조직이나 친족, 친구밖에 볼 수 없는 사람, 그래서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서만 함께 한다면, 그는 교회의 참된 통일성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모든 성도의 기쁨이 바로 나의 기쁨으로, 성도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느끼는 사랑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고린도 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개개인이 많은 은사를 받은 교회입니다.

따라서 병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등 개인의 능력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만 시끄러운 교회였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비난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소식이 사도바울에게까지 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예언을 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또한 고린도교회는 “나는 아볼로파, 나는 그리스도파, 나는 바울파, 등으로 나뉘어 져서 서로 잘났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가 무슨 능력이 있겠으며,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런 교회가 복을 받고, 이런 교회가 은혜가 넘치고, 이런 성도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꽃같은 주님의 심정을 소유하여 목회비전을 공유하고 우리 모두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열매를 맺어 교회의 머리되신 우리 주님의 손에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