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 (요한복음 5:1-9)

Johnangel 2023. 8. 31. 18:58

절망을 딛고 일어선 사람 (요한복음 5:1-9)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가지 기적 중 3번째 기적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표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요2:1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고, 요2:23절에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했고, 요4:5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매우 일관성 있게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표지판”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톨게이트를 지나 고속도로에 진입하면, 서울 혹은 부산라는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표지판은, 표지판 자체가 서울이나 부산 아닙니다.
다만 서울이나 부산으로 가는 길의 방향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따라서 이런 요한복음의 표적들은, 표적 그 자체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요20:30-3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영생을 얻게 할 목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적들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표적에서 우리가 배우는 전도는 무엇입니까?

1. 전도는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주경학자들은 이 명절을 “유월절”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런 큰 명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던 모든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은 한 주간 동안 거대한 축제의 불야성을 이루어 풍성한 음식과 음악 그리고 춤의 향연이 있고, 그리웠던 사람들과의 만남의 한 마당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운 잔치마당에서, 예수님의 눈은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더니”
어떤 병자들이었습니까?
맹인 곧 보지 못하는 사람, 다리 저는 사람, 그리고 혈기 마른 자, 곧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일차적인 전도대상은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일차적인 전도대상을, 우리는 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국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걷지 못하고, 영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 입은 우리 이웃들이야말로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다리는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 특별히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5-6절을 읽겠습니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누구를 보셨습니까?
서른여덟 해된 병자를 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8이라는 숫자는 방황과 절망의 숫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방황한 기간을 보통 40년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38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년 2년이 아닌 38년 동안 병을 앓으면서 차도가 없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절망적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주목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방황하고, 예수님을 몰라서 절망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순간 전도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2. 전도는 예수님의 질문을 전달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병자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베데스다 못가에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민속신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를 받는다”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병자는 “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연못에 들어갈 희망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병자에게 예수님은 “네가 정녕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의 효과로 무엇을 기대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희망의 점화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절망과 좌절에 익숙해져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어쩌면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숙명처럼, 체념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번 한 주간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이런 예수님의 질문을 대신 전달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은 그렇게 계속 사시겠느냐?” “구원받고 싶지 않으시냐?” “새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신가?” “천국의 소망을 갖고 싶지 않으신가?” “이제 자신이 아닌 예수를 한번 믿어 보지 않겠느냐?”고.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이 모든 질문을 오늘 본문의 방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질문에 직면한 그 순간 이 병자의 마음속에 일어난 모든 감정의 변화를 상세히 증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병자의 깊은 내면에서 “그래 나도 낫고 싶어” “나도 구원받고 싶어” “나도 변화 받고 싶어”하는 생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던지는 거룩한 질문이 바로 그들의 거듭남의 축복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전도는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사건입니다.

8-9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대답은 단순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살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고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를 일어서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지 않으십니까?

요6:63절을 읽겠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생명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이 38년 동안 질병을 앓아온 이 사람에게 “인생철학이나 도덕을 강론한다”고 해서 그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주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들것에 실려 친구들에 의해 운반되어 온 중풍병자를 일으키신 동일하신 주님이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위 진화론을 주창한 “찰스 다윈”이 우리는 “무신론자”라고 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사제가 되기 위해 영국성공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은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말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진화론 연구의 기반이 된 것은, 그가 남미를 방문했을 때 보았던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던 남미의 토인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지능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윈은 그들이 사람 노릇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지난 먼 미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해가 지난 후 다윈이 다시 그곳을 방문하고, 그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명인의 수준과 다를 것이 없는 변화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동안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로 선교사들이 그곳이 당도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윈의 적자생존이론이나 자연도태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윈의 신앙은,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서 붙든 것은 성경책입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나의 구주시여”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간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분만 만나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여러분,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주변에 절망과 좌절의 세월을 딛고 일어나 새 인생의 길을 걸어야 할 여러분의 이웃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제공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먼저 복음을 듣고 믿어,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이 가장 먼저 이 땅에서 할 일은,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열정이 넘쳐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되어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