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공동체 (빌립보서 4:4-7)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기쁨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너무나 많은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한 순간의 기쁨이 아닌 항존하는 기쁨을 “어떻게 소유하며 인생을 살 수 있는가?”는 더 중요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시며, 예수님 자신 안에 내재한 기쁨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요15:12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열매가운데 하나가 희락 곧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에서 자신이 유럽에서 최초로 개척한 교회이었던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주후 61년경 로마의 옥중에서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투옥으로 근심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아울러 빌립보교회 성도들도 여전히 주님의 기쁨가운데 거하며 살아갈 것을 부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두워도 우리가 기쁨의 공동체로 굳게 서있을 때에만 비로소 교회는 이 세상에 희망을 선물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가 기쁨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극복해야할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관계적 갈등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살이에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가장 빈번한 이유는,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한때 친밀한 인간관계로 기쁨을 나누던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입고 등져야 할 때, 우리는 살맛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때 교회의 교제권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함께 주의 일에 동역하던 교인들이 서로 얼굴을 피해야할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교회생활의 보람과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런 문제가 빌립보교회 내에도 일어났던 것입니다.
빌4: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교회 안에서 헌신적으로 복음을 위해 수고하던 두 여성 지도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3절에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언급했을 때, 바로 이런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갈등을 빚는 어떤 일이 일어났고, 이것이 빌립보교회 공동체를 아프게 만들었고, 바울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빌2:2-3절의 말씀은 우리로 이런 배경을 더 확신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틀림없이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지 못한 어떤 성도들 상호간의 갈등이 빌립보교회의 교제에 부담을 주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성도들에게 다시 빌2:4절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부탁합니다.
추측하건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종종 경험할 수 있는 자기사역 우선주의 등의 이기심으로 빚어진 갈등이 빌립보교회 공동체내의 기쁨을 상처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런 인간관계의 갈등의 처방으로 관용을 강조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부드러운 절제”라는 뜻입니다.
“관용”있는 사람이 진짜 성숙한 성도인 것입니다.
그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싸움이 되지 않도록 자기 절제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관용”이 있는 사람은 결코 경직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여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친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바울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씀합니다.
2. 상황적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여기 6절에 사용된 “염려”라는 단어는 본래 “마음을 나눈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나누어지고 찢어지면 걱정이 생깁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마음이 표류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염려”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염려들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그 성경적 처방이 “기도”입니다.
“염려할 모든 것을 기도할 모든 것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냥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붙들고 간절하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우리의 기도는 자연히 간구가 됩니다.
야고보는 약5:16절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간구할 때, 하늘은 창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했습니다.
약5:17-18절을 읽겠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그렇습니다.
“염려” 그 자체는, 전혀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간구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염려대신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기도와 간구가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할 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6-7절을 읽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저는 진실로 우리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믿음의 가족들이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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