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 (로마서 1:1-4)

Johnangel 2024. 6. 14. 15:3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로마서 1:1-4)

                                              

많은 사람들이 로마서를 “성경 중의 성경” “복음서의 핵심” “바울의 복음서”라 하고 “성경을 반지로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 즉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지난 2천년 동안의 교회역사를 볼 때, 여러 위대한 인물들이 로마서의 영향을 받았고, 그간 생겨난 거의 모든 이단들도 또한 로마서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그만큼 중요한 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왜 중요한지, 그 이유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성경 총 13편의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로마서를 제외한 나머지 서신들은 모두 자신이 세운 교회에 보낸 편지이거나, 디모데처럼 자신의 제자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편지 수신자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해답을 주기 위해 쓴 편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경우는 다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할 때까지 로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로마에는 이미 자생적으로 생겨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그곳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아직 사도들에 의해 양육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이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그 교회에 어떤 문제나 분쟁이 있어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과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서는 구원과 복음을 가장 체계적이고 신학적이고 신앙적으로 서술한 편지입니다.

로마서를 단순히 편지라고 말하기 이전에, 사람들은 로마서를 “구원의 복음에 관한 완벽한 논문”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를 보면, 구원이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가 없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와 같은 로마서를 오늘부터 매 수요일 저녁마다 우리가 함께 공부하는 동안 로마서의 가르침을 자신의 심령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기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둘로스”입니다.

둘로스의 뜻은, “노예”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 즉 “노예”라고 한 것은, 스스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있는 곳마다 자기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드러나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바울”이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어로는 “파울로스”입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 즉 “사울로스”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 왕을 배출한 지파로 유명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요구하다”입니다.

“요구”는 채워지면, 또 다른 요구를 낳기 때문에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울 왕도 왕위에 앉았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권력의 노예가 되어 비참하게 망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사울 왕은 선정을 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는, 사울 왕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지낸지 천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 최초의 왕을 낸 지파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아버지도 바울을 낳고서 그 이름을 사울이라고 지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전통을 따라 “초대 왕 사울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되라”는 뜻을 이름에 담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도행전 13장에서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그 이름이 “파울로스”로 바뀌었습니다.

“파울로스”의 뜻은 “작다”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서고 보니까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파울로스”라는 단어는 동사 “파우오”에서 파생되었는데 “포기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울은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철저하게 포기하였습니다.

빌3:5-8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 베냐민 지파인 것,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것,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인 것,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살아오면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자 하니 그 모든 것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바울이다”라는 말은 “그리스도 앞에서 작은 존재”라고 자신을 규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이며 “보내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포스텔로”에서 유래합니다.

즉 사도란 “보냄을 받은 사람”인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1절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순서로 볼 때 바울은, 주님 앞에서 둘로스가 되는 사람, 주님 앞에서 작은 사람, 즉 주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 아포스톨로스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순서대로, 우리가 주님 앞에서 노예가 되고, 스스로 작은 사람이 되어 주님의 택하심을 받는다고 한다면, 사실 우리는 모두 가망이 없는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것이 가장 먼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잔멸하고자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러 가던 사울을 주님께서 먼저 다메섹에서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 많은 인간을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먼저 불러주셨기 때문에,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표현할 수 없는 주님의 은총 앞에서, 사울은 자기 삶을 포기하고 비로소 “파울로스”가 되었고,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는 주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둘로스”가 된 것입니다.

 

2절을 읽겠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이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참인간이었습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부활하심으로 신성을 지닌 분으로 선포되셨습니다.

여기서 “선포되셨다”에 대한 바른 번역은 “확인되셨다”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확정되셨다”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이 확인되고 입증되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은 참인간이며, 부활자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4절하반절에 “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이라고 시작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만을 언급했는데, 4절에서는 “우리 주”라고 말함으로써 그 대상을 이 편지를 받는 로마사람들로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편지를 받는 사람이 바울과 마찬가지로 모두 다 “둘로스가 되고, 파울로스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2천 년 전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로마교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일 뿐만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자신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시간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있는 사람들보다 애당초 뛰어난 도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보다 많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는 택정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안다면 “이제부터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느냐? 하지 않느냐?”하는 것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로부터 택정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파울로스”가 되지 못하고, 자신을 더 키우려고 하여습니다.

가룟 유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파울로스”가 되지 못하고, 주님을 이용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려고 하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역시 불러주셨는데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얼마나 파울로스가 되고, 둘로스가 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나타나는지 구별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고, 주님 앞에서 더 낮아지는 파울로스가 되고,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둘로스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삶의 매 순간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