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8-15)

Johnangel 2024. 6. 20. 17:31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8-15)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잠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였고, 또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사랑 + 사람 사랑 =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언제든지 함께 맞물려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하게 터득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상고했듯이 바울이 다메섹으로 향할 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동료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님의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바울 혼자만 구원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바울만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기에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전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이란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야만인”는 헬라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당시는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이지만 그 이전에 알렉산더가 헬라제국을 만들고 헬라문명이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라틴어보다는 헬라어가 공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못쓰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한 야만인에게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든 모두 빚을 졌으며, 저드을 다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빚을 갚고자 하는데,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와 사상이 같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배운 사람이든 못배운 사람이든,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갚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각 정행” 즉 바르게 깨닫고 깨달은 것을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고 해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다 해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독교인이 25%를 차지하는데도 이 땅의 화평과 사랑의 열매는 그만큼의 정도로 맺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무척이나 익숙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에게 진 빚을 갚는 데는 인색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민의 75%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여기서 말하는 “온 세상”이란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온 로마제국에 전파되고 복음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독교가 박해 받기 전으로, 로마제국이 극도로 타락하고 온 사회에 사치와 부패와 방종이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공직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못난 사람으로 치부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절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높이고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모습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 우리에게 선교라는 지상 명령을 주신 것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지 않고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이 잘되는 길에서 자꾸 끌어내리려 하고 모함하고 과소평가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항상”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지만 빈말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사랑입니까?

요즘은 참 복잡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밤까지 시간에 쫓기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유롭게 편히 앉아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간구하는데, 기도 시간이 짧다보니 자기 것도 간구하기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러니 언제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도를 한번 살펴봅시다.

나와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들을 위해 하루에 몇 분을 기도하십니까?

사랑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기도는 성령님께서 역사하는 시간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사랑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으로 찾아가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동적인 편지 한 장 띄우는 것으로 할 일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길이 막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결국 로마를 찾아갔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사랑은 그 사람을 찾아가 그의 손을 잡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중해를 건너갈 때 태풍을 비롯해서 커다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을 무릅쓰고 로마로 가서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가 남의 처지에 맞춰 그와 함께 하는 것, 나보다 못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랑은 상대방의 수준으로 나를 나추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부부간도 남남처럼 됩니다.

부부간에 문제가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의 수준차이 때문입니다.

의식 수준, 감정 수준 등이 다름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많을지라도 내가 상대방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와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