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은혜와 평강 (로마서 1:1-7절)

Johnangel 2024. 6. 16. 16:55

은혜와 평강 (로마서 1:1-7절)

                                                

진리의 노예가 되고 작은 사람이 되어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가운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진리의 노예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에 일어났던 일은 이 순서와 반대입니다.

바울이 죄 가운데 있었음에도 주님께서 먼저 그를 택정하여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불러주심에 힘입어 바울은 파울로스, 즉 교만한 자리에서 겸손한 자리로 내려갈 수 있었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비로소 주님의 종, 진리의 노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봐야합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시고 택정해 주신 것이 뭐가 그토록 대단하고 기쁘며 감격스러운 일이기에 이처럼 진리 앞에서 파울로스가 되고 둘로스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행9:7절을 보면 “바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아 그저 멍하게 서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빛을 바라보던 그 극적인 순간에 말입니다.

바울이 동료들 중 가장 나은 사람이라서 혼자만 선택을 받았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딤전1:1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인 중에서 가장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대적하던 사람들의 괴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해 진리를 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알게 하시고, 이 세상의 거짓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한 사랑과 은혜 앞에서 바울은 파울로스가 되고, 둘로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택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지나치다가 우연히 찍히신 것이 아니라, 바울을 아시고 정확하게 집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사43: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주님께서 우리 역시도 그렇게 집어내주셨습니다.

 

우리나라에 4천만 국민 가운데 1천만 명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네 사람 중 한 명이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네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들과 비교해 나는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 사람을 제외하고 나를 택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을 올바로 깨닫는 사람만이 삶의 목표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목표가 없든가, 있어도 바른 목표가 되지 못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뛰어가며 돈을 버느라 자식 얼굴 한번 제대로 볼 수 없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평생 혼자 써도 남을 만큼 돈을 벌고도 계속해서 돈에 집착하는 이유는,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뒤 그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해답을 얻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약속해 오셨던 당신의 아들 “그분이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어떤 분이십니까?

3-4절에 보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분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어 이 땅에서 참된 가치의 삶을 살게 하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을 많은 벌어도, 아무리 천하를 움직이는 권력을 쥐고 있어도, 명예가 아무리 태산처럼 높아도, 죽어서 관에 들어가 관 뚜껑에 못이 박히는 순간 그 돈과 권력은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가치도 그 관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분, 우리에게 영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분, 그분이 곧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이 중요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시고,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만이 우리의 안내자가 되십니다.

바울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인식한 뒤 자신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것이라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목표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는 것이 바로 바울의 삶의 목표였습니다.

“누군가가 그리스인이 지녀야 할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체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삶의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주신 이유,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신 이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시는 이유,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은 생명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임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신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복음에 대한 사도바울의 크나큰 열정을 대변해 주는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1-7절까지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인사말을 전하는 편지의 서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지를 쓸 때 먼저 수신자 이름을 쓰고 나서 발신자 이름을 밝힙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헬라 문화에서는 편지 쓰는 사람이 자신을 먼저 밝힌 뒤 받는 사람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먼저 드러내고, 수신자의 관한 내용은 7절 상반절에 나옵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리스”로써 “대가를 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이들이 보상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계획하는 일이 잘되어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곤 합니다.

자신의 계획이 순조롭게 풀여 갈 때 평강 곧 샬롬을 누립니다.

반면에, 계획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때 우리는 절망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그리스도의 은혜와 형강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순종은 곧 말씀에 대한 순종과 상황에 대한 순종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면, 나에게 주어진 지금의 상황 역시 나를 택하시고 세우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빋어야 합니다.

 

1절에서 7절까지 “입었다.”는 단어가 한번 “받았다”는 단어가 다섯 번 “택정되었다”는 단어가 한번 나옵니다.

그런데 일곱 개의 단어가 무엇을 강조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세우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도로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주시고,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 주시고, 새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 가운데 있었음에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불러 세워 새 생명을 주셨음을 믿는다면,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이 있든지 그 상황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비하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더 큰 은혜와 평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롬8:32절을 읽겠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죽이고 우리를 택하여 살리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우리 앞에 어떤 상황이 닥쳐도 문제가 없습니다.

 

요셉은 가나안 땅에서 갑부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형들로부터 애굽의 보디발장군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집에서도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세월이 13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과 창세기 40장 어디에도 요셉이 보디발장군 집에서나 감옥에서 탈출하여 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요셉은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들을 통해 요셉을 바로왕 앞에 세우심으로 결국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시34:10절에서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젊은 사자가 어떻게 궁핍하겠습니까?

절대 궁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 궁핍할지언정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시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척하다가 쫓겨나 지은 시라는 사실입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이스라엘에 숨을 곳이 없자 가드 왕 아비멜렉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 척했습니다.

그러고는 겨우 생명을 부지한 뒤 이 시를 쓴 것입니다.

다윗은 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미친 척 하지 않으면 목숨조차 주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 가장 어려움과 고통을 경험합니까?

어떤 상황이나 결과가 내 계산과 맞지 않을 때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을 예비해 주심을 알기에,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합니다.

삶이 힘겨운 질곡에 놓인다 해도 당신의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께서 더 좋은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기 위함임을 믿고 삽시다.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날마다 차고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