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행한 대로 (로마서 2:6-11)
지난 시간에 도덕적 인간의 첫 번째 부류는 “자기도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임을 상고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진노가 반드시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것이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대원칙입니다.
여기에서 첫 단어인 “하나님께서”가 중요합니다.
기업에서는 상사들이 직원들에 대한 고과 점수를 매깁니다.
그리고 연말이면 그 고과표에 따라 인사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쓰는 고과표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지배를 맏고 다은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고과표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인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죽였습니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는지 물으시자 가인은 모른다고 하면서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동생의 핏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 대한 고과표에 “너는 살인자”라고 쓰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도바울이 위대한 인물로 나옵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바울이라는 사람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결박당하고 그 안에서 편지를 쓴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높이 들어 그 삶을 통해 세계를 바꾸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고과표는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화려한 삶을 살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그 중심과 진실됨을 평가하시어 시공을 초월해 지금도 우리 앞에 바울이 우뚝 서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고과표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이 회사에서 좋은 고과를 못 받으면 다른 회사로 옮겨 잘 받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고과표는 영원불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원불변의 고과표를 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고과표의 공란은 채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 고과표를 채우고 있습니까?
지금 이 수간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깨어 바른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음으로 나오는 말은 “ 각 사람에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과 점수를 단체로 매기지 않고 개별적으로 매기십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함께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천국에 간다고 할 때 우리의 고과 점수가 같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물으십니다.
즉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져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는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늘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누구와 있느냐?”입니다.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삶에서 끊어져서는 안 되며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그릇된 장소, 그릇된 만남이 반드시 바뀝니다.
만일 바꾸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바뀐 사람은 그릇된 상황에 처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6절에서 “각 사람에게” 다음으로 나오는 말은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입니다.
“보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디도미”의 뜻은 “값을 치르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값이든 선한 값이든, 반드시 그 값을 치르시는 분입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왜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는가? 이에 대한 답은 질문을 바꿔보면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데,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왜 상사가 내 고과표를 쓰는가? 하는 그 이유는, 내가 회사에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의 근무 시간은 나 개인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과표에 의해 내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삶에 보응하십니까?
내 삶이 내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감독하시고 우리의 삶에 보응하시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면서도 실상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할 때만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또다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면 과연 하나님의 보응을 피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응을 피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중심이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느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해서 전과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대통령이 특별 사면해 주어 가석방되었습니다.
이후 이 사람이 “삶의 방향을 오디로 두고 있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이제부터 새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전에 몸담았던 범죄 소굴에 다시 발을 담그고 있다면, 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입으로 아무리 새 삶을 다짐해도 그런 곳과의 접촉점을 끊지 못하면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그가 새로운 자리, 새로운 사람들을 향해 걸어간다면, 비록 실수하며 넘어지고 흔들릴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의 삶은 승리의 열매를 맺어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전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은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해 있는 한,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주님께서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한, 그 삶은 반드시 변화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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