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그 행한 대로(2) (로마서 2:6-11)

Johnangel 2024. 8. 7. 15:40

그 행한 대로(2) (로마서 2:6-11)

                                           

여러분의 삶의 방향은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이 주님을 향해 있는 한,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주님께서 이런 것을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한, 그 삶은 반드시 주님께서 변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7절을 읽겠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그런데 한글 성경과 헬라어 원문의 순서가 다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 먼저 나옵니다.

여기에서 “영광”을 나타내는 헬라어 “독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합니다.

사랑에게는 이 단어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즉 자신이 진리를 향해 서 있다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자기 주머니만 챙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모리배”라고 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라의 존영과 국민을 생각지 않고 그 권력으로 자기의 부귀만 추구한다면, 그런 사람을 일컬어 “정상배”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해 자기의 유익과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그릇된 신앙의 모리배요, 정상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습관으로 굳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습관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아쉬울 때만 주님을 찾게 됩니다.

 

둘째, “존귀”를 구하는 것입니다.

존귀는 헬라어로 “티메”인데 그 본뜻은 “가치”입니다.

예수님께서 마7:6절에서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돼지는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돼지는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썩은 것이든 상한 것이든 영양가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않고 먹습니다.

배만 부르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이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하고 따지기 전에 자기 욕망과 이권에 맞아떨어지고 자기 배만 부르면 먼저 취하고 봅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삼을 결정짓는다는 것은 모든 욕망과 야망을 뛰어넘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썩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진리입니다.

주님을 향해 삶을 결정짓는다는 것, 주님의 영광만을 드러낸다는 것, 영원한 가치를 따진다는 것은 진리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3:6절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육에 관심 있는 사람은 썩어질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해 사람,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썩지 않는 진리를 주목합니다.

상인 남자들은 거의 매일 면도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하루 5분으로 잡고 평생을 계산해 보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남성분들은 면도하기 위해 5분을 사용하는 만큼 영적인 삶을 우해서도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진리를 안다 해도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영에 속해 있어야 진리를 실천하는 힘을 갖게 되고, 진리를 실천해야 진리가 주는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진리를 실천해 보지 않으면 진리가 주는 참된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하고 늘 평행선을 긋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주님을 향해 방향을 결정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존귀를 구하고, 썩지 않는 것을 구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평소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해주시고, 존귀하게 해주시고, 진리를 위해 살게 해달라는 말들을 흔히 듣고 또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7절은 이것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있는 “참고 선을 행하여”라는 구절은, 정확하게 말하면 “참고 선을 행하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구하고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구함이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선을 행하는 삶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행하지 않고 내뱉는 모든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참는다”고 할 때, 무엇을 참는다는 말입니까?

외적인 것에 대한 참음과 내적인 것에 대한 참음 모두를 의미합니다.

내가 상상조차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증오심이 일어도 참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참는 것이 정말 주님을 위한 길입니까?

“참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휘포메노”인데 “휘포”는 “....의 밑에”라는 뜻이고 “메노”는 “거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참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밑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못 참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겨야 하니까 못 참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밑에 있으면 못 참을 일이 없습니다.

자존심도, 감정도 문제 되지 않습니다.

아내가 남편 밑에만 있겠다고 생각하면 못 참을 일이 없습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 밑에 있겠다고 하면 못 참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 밑에 거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삶의 방향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밑에 거할 때, 비로소 제자들의 발밑, 가장 낮은 곳에서 인간을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 밑에 거하면 거할수록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자꾸 높여 주십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 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경멸을 받게 됩니다.

가령 누가 여러분 앞에서 저에게 욕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제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여러분 앞에서 그와 한바탕 싸울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겼다고 하십시다.

제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은 속으로 “저 사람이 목사인가?”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가 수모를 용납하며 지혜롭게 넘긴다면, 잠시 잠깐 제 속은 괴로울지 몰라도 여러분은 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23:12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늘 위에서 추상적으로 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낮은 땅에 소셔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이 말씀을 받들어 다른 사람 밑에 거해야 합니다.

 

7절 하반절에는 이런 사람에게 “영생”이 주어진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에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는 것을 구하는 삶은 이미 영생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죽음이란 마치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고후5:1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자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 위의 새로운 장막이 우리에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방향을 주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좁은 문, 좁은 길처럼 보이는데, 시상은 형통한 길이자 영원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