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1-5)

Johnangel 2024. 7. 12. 18:59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로마서 2:1-5)
                                             
인간은 세 부류가 있는데, 지난 시간에 형이하학적 인간으로 본능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상고했습니다.
오늘은 형이상학적 인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2장 전체는, 이 두 번째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인간을 다른 말로 철학적 인간, 성경에서는 도덕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게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나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도덕적 인간 중에서도 첫 번째 부류에 속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특징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판단”은 헬라어로 “크리노”인데,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정죄 혹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은 도덕을 논하지 못합니다.
 
둘째, 그들은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자기도 똑같이 그 잘못을 범하는 사람입니다.
 
마7: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자기의 할 일은 언제든지 덮어두면서 남의 일만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첫 번째 부류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정말 주님 안에서 깨어 있지 않으면, 이와 같이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 지식으로만 무장하면, 그 말씀이 살아서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식의 말씀을 도덕적 잣대로 삼아 남에게만 들이대며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리에 앉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제삼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것이 남을 심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으로 권면하는 것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증오심이 있다면 그것은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지라도 그 안에 증오가 있으면, 결국 그 증오가 드러나며 심판하는 것이 됩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사람들은 정죄하는 말을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말은 진실성도 결여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마음이 있다면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권면하는 사람은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남을 끌어내리려 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언급하고 있는 상대의 잘못을 자신이 범치 않는다면 권면하는 것입니다.
 
삼하12:1-15절을 보면, 부하의 아내를 취한 다윗을 나단 선지자가 사랑으로 권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일 나단이 다윗을 정죄했다면, 다윗은 그에게 반발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나단 선지자는 남의 유부녀를 데려다가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을 권면하려 한다면, 적어도 권면하는 그 부분에서만큼은 깨끗해야 합니다.
 
넷째는, 회개의 열매가 맺힌다면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권면함에도 한순간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권면하는 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반드시 언젠가는 회개의 열매가 맺힙니다.
반대로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남을 권면해도 그 실체가 정죄라면 남는 것은 적개심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타락한 도덕주의자가 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집니까?
 
2절을 읽겠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에서 “심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마”는 “취소 불가능한 판단”을 뜻합니다.
내가 남을 험담하고 판단하는 것은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고 심판하시는 것은 취소 불능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이러한 속성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진리대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 마땅히 임한다.”는 의미입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즉 무고하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판단과 정죄가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도 그는 심판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심판을 대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령 신하가 살아있는데도 자신이 임금의 고유 업무를 하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역모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한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심판자이십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람을 가리켜 심판자라고 기록된 곳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역할을 빼앗은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남을 험담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자하시고 용납해주시고 참아주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그 어원이 “여자의 자궁”입니다.
여자의 자궁에 태아가 생기면 자궁은 태아를 최대한 보호합니다.
설령 그 태아가 기형이라 하더라도, 자궁은 자기 생명을 나누며 최적의 조건으로 태아를 보호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용납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케”는 “참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끊임없이 참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참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의 인생은 이미 끝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길이 참으심”은 오래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참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상대방이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부부지간에도, 부자지간에도, 형제지간에도 참는 것이 고통입니다.
우리가 온갖 죄를 지음에도 하나님께서 참고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감수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참으십니까?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남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심판한다면, 곧 인자하시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집스러운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고집”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굳은 것, 강한 것”입니다.
강퍅한 마음에 지식이 더해지면, 그것은 자기와 남을 동시에 죽이는 독약이 됩니다.
알면 아는 만큼 남을 더 심판하게 됩니다.
고집스러운 마음과 회개치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진노를 쌓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쌓는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 “대사우리조”는 보물을 뜻하는 명사 “데사로우스”에서 왔습니다.
사람들이 보물을 쌓으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쉴 틈도 없이 애씁니다.
보물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애씁니까?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매일 모아두었는데, 마지막 날 뚜껑을 열어보니 전부 하나님의 진노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많은 것을 쌓았어도 그 쌓은 것은 결국 자기 멸망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남을 정죄하고 자신도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 하는 패역한 도덕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죄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는 “성도의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사람은 자신이 큰 죄인임을 자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큰 죄인임을 더 깊이 자각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더 큰 으인”이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모순되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임할수록 예전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던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럴수록 주님 앞에 더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 말씀대로 살아가려 애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참다운 의인의 삶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설령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음에도 삶이 개선되지 않거나, 계속해서 이중적인 삶을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삶을 탈피하고 청산해 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꺾고 찢으십니다.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조인 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걸어가느냐, 아니면 매일 찢어지고 꺾이면서 바로 세워지느냐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흔들고 계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나 역시 잘못을 범하고 있음에도 나와 똑같은 잘못을 행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뽑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서 고쳐져야 합니다.
나의 들보를 뺀 다음에는 티끌이 있는 형제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있는 곳이 에덴동산이 됩니다.
정죄는 남을 죽이는 것이지만, 사랑의 권면은 남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람을 살리는 권면의 사람이 될 때, 바로 그곳에 사랑이시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